정책학부 - 故 박익수 박사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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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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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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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송상용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
소민 뱍익수는 일제하 1924년 함남 이원에서 태어나 경성공립공업학교 요업과를 마치고 해방후 서울대 사범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했다. 그는  한양공대와 서울대에서 무기화학과 자연과학개론을 강의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 때부터 과학 자체보다는 과학의 철학적・사회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한눈을 팔지 말라는 교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도는 계속되었고 신문, 잡지에 글을 자주 썼다. 그는 50년대 한국에서는 드문 과학 논객이었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둘러싼 장내원, 윤세원과의 논쟁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과학기술학(STS)의 선구자로서 소민의 왕성한 활동은 30대 초반 두 권의 저서로 열매를 맺었다. 철학자 박종홍의 추천으로 1955년에 출간된 「과학의 철학」은 현대물리학의 철학적 문제들을 다룬 책이었다. 「신과학사개론」(59)은 동력을 중심으로 한 시대구분이 이채로왔다. 이 책들은 뒷날 각각 「과학의 반사상」(86), 「과학기술의 사회사」(95)로 개정판이 나왔다. 그만큼 소민의 애착이 컸던 책들이다. 특히 「과학기술의 사회사」는 2000년에도 다시 개정판을 낼 정도였다.
 1960년 한국과학사학회가 출범했을 때 소민은 김두종, 홍이섭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0년대에는 김두종, 권녕대에 이어 제3대 회장으로 학회를 이끌었다. 그는 서초동의 개인 사무실을 오랫동안 학회에 내 주며 학회 발전에 공이 컸다.
 4.19 뒤 태어난 민주당 정부는 내분에 휩싸인 원자력연구소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사정부는 원자력에 관한 글을 많이 쓴 소민을 발탁해 수습을 맡겼다. 이를 계기로 소민은 상임 원자력위원이 되어 10년 동안 관직을 누렸다. 그동안 그는 원자력발전추진위원장, 원자력산업회의 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원자력위원을 물러난 소민은 한동안 재계에 몸을 담았다. 오래 친분이 있던 동양그룹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동양시멘트의 이사로 있다가 동양시멘트판매(주) 사장을 지냈다. 학자 체질인 그에게 기업은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기회였다.
 1977년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 있는 학자, 언론인, 출판인들이 모여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만들었다. 소민은 홍문화, 김정흠, 이장규, 현원복, 손영수 등과 함께 참여해 초대 부회장, 3대 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협회는 기대에 못 미쳐 친목단체에 머물렀으나 소민은 늘 그 중심에 있었고 산업시찰을 많이 마련해 회원들을 즐겁게 했다.
 소민은 사무실에 과학사회연구소 간판을 달고 은퇴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원자력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안전관리 문제로 뛰어다녔고 한전에 쓴 소리를 퍼 부어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형섭은 소민을 가리켜 “원자력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 했거니와 그는 오랜 천착 끝에 1999년 「한국원자력창업사」 3부작을 완성했다. 이것은 현장을 지켜 본 과학사학자의 빛나는 업적이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소민은 김대중 후보의 과학 특보가 되어 세상을 놀래게 했다. 김대중은 부산 피난시절 면학동지회에서 소민을 만났고 아우를 맡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국민의 정부가 출발하면서 소민은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장관급)을 맡았다. 그는 연구개발사업의 평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열을 올렸으나 그의 뜻을 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소민 박익수는 일제 치하에서 21세기 디지틀시대까지 격동기를 살았다. 이 나라의 과학계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결코 작지 않다. 그는 지나치게 과학을 사랑한 구세대였지만 인문학적인 여유도 가진 선각자였다. 그가 단순한 과학자에 머물지 않고 일찍이 과학기술학에 눈 떴기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은 것을 세상은 알아주기에 인색했다. 소민의 바른 소리가 후학들의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1. 박익수 선생과의 만남
내가 소민 박익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58년 여름이었다. 내가 과학자의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간 것이 1955년이다. 그 해에 <과학의 철학>이란 묘한 제목의 책이 나왔다. 31살 난 과학도가 쓴 책이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종홍 교수의 서문이 붙어 있었다. 철학 책이라야 개설서 너 댓 권이 나와 있던 때였다. 나는 이 난해한 책을 거푸 읽었다. 이해는 못했어도 과학철학이 매력 있는 분야라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 뒤 이 책을 쓴 이의 이름이 신문 문화면에 가끔 나타났는데 직함은 과학평론가로 나왔다. 그가 서울대에서 무기화학과 자연과학개론을 맡고 있는 강사이며 전공이 과학사란 것도 이내 알게 되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자연과학을 단념하고 인문사회과학과 다리 놓는 몫이 하고 싶었다. 단칸 방으로 소민 선생을 찾은 나는 그의 후배가 되겠다는 결의를 털어 놓았다. 그는 과학사의 길이 얼마나 외롭고 험한가를 강조하면서 나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었다. 
1960년 철학과에 학사 편입한 나는 화학과 은사 이종진 선생을 따라 함춘회관에서 열린 한국과학사학회의 창립총회에 갔다. 거기서 김두종, 홍이섭 선생과 함께 박익수 선생도 반갑게 만났다. 2년 뒤 학회 간사로 임명된 나는 학회 행사 때마다 소민 선생을 뵈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나는 공릉동에 있는 서울대 교양과정부에 강의를 하러 매일 나갔다. 원자력위원이 된 소민 선생의 사무실이 가까운 원자력연구소에 있어 자주 들렀다. 내가 성균관대에 취직한 이듬해 소민은 한국과학사학회의 회장이 되었다. 나는 간사로서 4년 동안 박 회장을 잘 모셨다.
1977년 나는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 있는 과학자, 언론인, 출판인들을 규합해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만들었다. 소민 선생은 부회장으로 뽑혔다. 나는 간사장으로서 세미나, 국제회의, 산업시찰 등을 하며 90년대까지 함께 일했다. 소민이 회장일 때는 내가 부회장이었고 회장 직을 물려 받았다. 그때는 협회가 소민 서생의 서초동 개인 사무실에 있어 뻔찔나게 드나들었다. 친구 백영훈 박사와 내기바둑을 즐기던 소민은  갈 때마다 동네 맛집에서 점심을 사 주었다.
기업에서 잠시 일했을 때를 빼고는 한가로운 삶을 즐긴 소민은 말년에 학생시절 의 벗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과학 담당 특보를 지냈고 이어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때도 내가 국제학회에 갈 때는 노자를 쥐어 주었고 무거운 연구 용역을 주었다. 소민 선생과의 만남은 50년 넘어 계속된 셈이다. 정년 직전 내가 인문대학장일 때 자연대학장과 함께 소민 선생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드리자는 제안을 했다. 총장은 대학에 도움이 안 된다고 기업인에게 명예학위를 주었다. 나는 미안해서 이 얘기를 알려 드리지도 못했다. 2003년 한양대는 8순이 다 된 소민을 석좌교수로 모시려고 했다. 철학과의 의견을 따라 13살 젊은 내가 그 자리에 가게 되었다. 기막힌 인연이다. 
2. 박익수가 걸어온 길 
 
 소민 (素民)  박익수 (朴益洙)는 일제하 1924년 12월 5일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3ㆍ1운동 때 독립만세를 주도한 죄로 일경을 피해 산속을 헤매다가 객사했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소민은 고향에서 소학교와 심상고등소학교를 마치고 1938년 서울로 올라가 명문 경성공립공업학교 요업과에 합격했다. 소민은 1943년 경성공립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준비를 하다가 폐결핵에 걸려 포기하고 해방 후 1946년 서울대 사범대 화학교육과에 들어갔다. ‘국랍서울대안’이 나오면서 좌우익의 싸움으로 대학은 큰 혼란에 빠졌다. 소민도 데모에 끼여들어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지만 정치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소민은 대학에서 화학보다 과학론 책들을 즐겨 읽었다. 이시하라 (石原 純), 타케우치 (竹內時男), 타나베 (田邊 元), 시타무라 (下村寅太郞) 등의 과학론 책들과 소겐샤 (創元社) 의 과학총서에서 설리번 (Sullivan)의 「과학의 한계」, 인펠트 (Infeld)의 「물질의 신비」, 에딩튼 (Eddington)의 「물리학의 철학」, 보어 (Bohr)의 「원자이론과 자연기술」 등을 읽었다.
 소민은 대학, 정부, 기업에서 교육, 행정, 경영을 성심껏 했고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2006년 11월 27일 소민은 이발하고 후배 임용규의 사무실에 들러 환담하다가 집으로 갔다. 목욕하다가 쓰러져 회복하지 못했다. 82살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소민 박익수는 일제 치하에서 21세기 디지틀시대까지 격동기를 살았다. 이 나라의 과학계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결코 작지 않다. 그는 지나치게 과학을 사랑한 구세대였지만 인문학적인 여유도 가진 선각자였다. 그가 단순한 과학자에 머물지 않고 일찍이 과학기술학에 눈 떴기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을 잃지 않은 것을 세상은 알아주기에 인색했다. 소민의 바른 소리가 후학들의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3. 대학, 정부, 기업에서 올린 업적
 
 소민은 한양공대와 모교에서 무기화학과 자연과학개론, 과학사를 강의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 때부터 과학 자체보다는 과학의 철학적・사회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한눈을 팔지 말라는 교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도는 계속되었고 신문, 잡지에 글을 자주 썼다. 그는 50년대 한국에서는 드문 과학 논객이었다. 한미 원자력협정을 둘러싸고 동아일보에 장내원, 윤세원과 13번 벌인 논쟁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4.19 뒤 태어난 민주당 정부는 내분에 휩싸인 원자력연구소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사정부의 오원선 원자력원장은 원자력에 관한 글을 많이 쓴 소민을 중앙정보부 과학판단관으로 발탁해 수습을 맡겼다. 이를 계기로 소민은 상임 원자력위원 (차관급) 이 되어 10년 동안 관직을 누렸다. 그동안 그는 원자력발전추진위원장, 원자력산업회의 부위원장 등을 지내면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원자력위원을 물러난 소민은 한동안 재계에 몸을 담았다. 오래 친분이 있던 동양그룹이양구 회장의 부름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동양시멘트의 이사, 상무, 전무로 있다가 동양시멘트판매(주) 사장을 지냈다. 동양그룹을 물러난 뒤에는 유양원자공업 (주) 회장으로 잠시 있었다. 학자 체질인 그에게 기업은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기회였다.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소민은 김대중 후보의 과학 특보가 되어 세상을 놀래게 했다. 김대중은 부산 피난시절 면학동지회에서 소민을 만났고 아우를 맡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이희호는 대학 동창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출발하면서 소민은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장관급)을 맡았다. 그는 연구개발사업의 평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열을 올렸으나 그의 뜻을 펴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4. 과학기술학의 개척자 
 
 과학기술학(STS)의 선구자로서 소민의 왕성한 활동은 30대 초반 두 권의 저서로 열매를 맺었다. 철학자 박종홍의 추천으로 1955년에 출간된 「科學의 哲學 - 問題의 두 方向 -」은 한국에서 처음 나온 과학사ㆍ과학철학 책이었다. 박종홍은 환도 후 서울에서 만난 소민에게 잡지 「思想」에 쓴 글을 보았다고 하면서 책으로 발전시킬 것을 권했다. 소민은 암자에 들어가 반년 걸려 책을 탈고했다. 박종홍은 백영사를 소개했고 서문을 써 주었다. 이 책은 그리스, 중세, 근대의 자연 개념과 상대론, 양자론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다음 현대과학의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 책은 뒷날  「과학의 반사상」(1977, 1986, 1999, 2001) 으로 제목을 바꾸어 개정판이 나왔다. 「新科學史槪論」(1959)은 동력 (원시동력, 자연동력, 증기동력, 전기동력, 원자동력) 을 중심으로 한 시대구분이 이채로웠는데 「과학기술의 사회사」(1995, 2001)로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만큼 소민의 애착이 컸던 책들이다. 
 1960년 한국과학사학회가 출범했을 때 소민은 김두종, 홍이섭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0년대에는 김두종, 권녕대에 이어 제3대 회장으로 학회를 이끌었다. 그는 서초동의 개인 사무실을 오랫동안 학회에 내 주며 학회 발전에 공이 컸다. 1999년 결성된 한국과학철학회에서는 소민을 명예회원으로 모셨다.
 1977년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있는 학자, 언론인, 출판인들이 모여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만들었다. 소민은 홍문화, 김정흠, 이장규, 현원복, 손영수 등과 함께 참여해 초대 부회장, 3대 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협회는 기대에 못 미쳐 친목단체에 머물렀으나 소민은 늘 그 중심에 있어 기금을 마련했고 산업시찰을 많이 마련해 회원들을 즐겁게 했다.
 소민은 사무실에 과학사회연구소 간판을 달고 은퇴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원자력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안전관리 문제로 뛰어다녔고 한전에 쓴 소리를 퍼 부어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최형섭은 소민을 가리켜 “원자력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 했거니와 그는 오랜 천착 끝에 1999년 「한국원자력창업사」,「한국원자력창업비사」, 「한국원자력측면사」 (2002, 2004 개정판) 3부작을 완성했다. 이것은 현장을 지켜 본 과학사학자의 빛나는 업적이다.
<부록 1> 박익수 연보  
학력 
 1938  경성공립공업학교 요업과 입학
 1943  경성공립공업학교 요업과 졸업
 1946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교육과 입학
 195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교육과 졸업
 
경력 
 1952  한양공대 전임강사
 1952-1965  서울대 사대ㆍ공대, 중앙대, 서강대 강사 (무기화학, 자연과학개론, 과  학사)
 1963-1972  상임 원자력위원
 1965-1966  국가안전보장회의 민방위개선위원
 1965  국제원자력기구 (IAEA) 제9차 총회 (도쿄) 대표
 1966-1968  원자력발전계획 심의위원장
 1966  원자력발전기술조사단장으로 동남아, 유럽, 미국 시찰
 1066-1967  국가안전보장회의 국가동원체제 연구위원
 1967-1971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자연과학분과위원장
 1967  방사선 취급 감독자 면허 취득
 1968  원자력 평화적 이용법에 관한 회의 (빈) 참석
 1968  국무총리 직속 원자력발전 추진위원
 1968  한국전자계산연구소 컴퓨터 감독자 훈련과정 수료
 1969  한국원자력학회 감사
 1969  원자력 보험 전문가 회의 (빈) 참석
 1970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창립위원, 부회장
 1972-1976 동양시멘트공업 (주) 이사, 상무, 전무
동양시멘트판매 (주) 사장
 1977-1978  유양원자공업 (주) 대표이사 회장
 1972-1984  한국원자력산업회의 부회장
 1978-1982  한국과학사학회장
 1985  한국방사성동위원소협회장
 1988-1994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1988-1989  (사) 한국과학사회연구소 소장
 1989  원자력발전안전민간협의회장
 1990-1992  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1992-1997  원자력안전전문위원, 위원장
 1994-2006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1997  김대중 대통령 후보 과학 특별보좌관 
 1998-2002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장
상훈 
 1972 국민훈장 동백장
 1989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진흥상
 2003  근정훈장 (청조)
<부록 2> 박익수의 저술 목록  
A. 저서 [19권]  
(1) 과학의 철학 - 문제의 두 방향, 백영사, 1955.
(2) 과학의 반사상, 과학과인간사, 1977. (1)의 개정판, 과학세기사, 1986, 과학문화사. 1999, 도서출판 경림, 2001.
(3) 신과학사개론, 신광사, 1959.
(4) 과학기술의 사회사 - 동력사적 입장에서,  진한도서, 1995. (3)의 개정판, 도서출판 경림, 2001. 개정증보판.
(5) 한국과학기술30년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1980. 공저
(6) 과총 20년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1987. 공저
(7) 한국원자력창업사, 도서출판 경림, 1999, 2002, 증보개정판, 2004, 증보개정 3판..
(8) 한국원자력측면사, 도서출판 경림, 1999, 2004 증보개정판.
(9) 한국원자력창업비사, 도서출판 경림, 1999, 2004, 증보개정판.
(10) 과학과 인간, 인간사, 1959.
(11) 인문계 고등학교 검정교과서 화학 I, 법문사, 1968. 공저
(12) 세계의 과학가 70인. 그들의 업적과 생애, 여원사, 1960. 
(13) 과학자의 발자취, 1969.
(14) 발명발견 이야기, 과학기술후원회, 1969.
(15) 과학상위시대, 전파과학사, 1977. 
(16) 창조시대와 역사, 부림출판사, 1984.
(17) 지성의 오솔길에서, 부림출판사, 1984.
(18) 풍요의 꿈과 현실. 세계를 바라보며 생각하며, 겸지사, 1990.
(19) 진실은 오히려 모순 속에, 과학문화사, 1995.
B. 역서 [4권]  
(1) 현대인의 지성, 인간사, 1957. 
(2) 무라카미 요이치로, 근대과학과 성속혁명, 부림출판사, 1981.
(3) 웨이드 브로드, 배신의 과학자들, 겸지사, 1989.
(4) 반물질의 세계, 전파과학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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