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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부 - 故 김진일 박사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6-01-05
Hit |
6868

 



 


 


 


 


집필자: 이리형 (한양대학교)



김진일 선생님을 회상하며


 


  우리나라 건축설계 및 계획분야의 대가이셨던 果川 金眞一 교수님의 업적과 일생 걸어오신 길을 많은 제자들과 후배 교수들을 대표하여 제가(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 제자 겸 후배 교수 이리형) 글로써 소개해 드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몇 마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만 과천 김진일 교수님의 크나큰 업적을 되돌아보며, 교수님은 국가 사회 발전의 동량을 키워오신 교육자로서, 건축계 및 건설업의 살아있는 역사요, 증인으로서 교수님의 삶은 도전과 성취, 헌신과 영광이 함께 한 나날이었다 하겠습니다.
  김진일 교수님께서는 1962년 9월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부임한 이래 약 30여 년간 봉직하시면서 학부학생 5,000여 명과 석·박사과정 학생 100여 명을 배출하는 등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이들은 현재 국내외 건축계의 교육 및 건설업 관련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진일 교수님은 한양대학교의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하시면서 대학 구조개혁, 대학발전 추진기획단 등을 이끌며 대학발전을 선도하셨습니다. 특히 교양학부장을 하시면서 교양분야의 과목을 대폭 확충하시어 학생들에게 다양한 과목을 청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 뒤 학생처장으로 부임하시면서 학생들의 민원 상담소 개설, 장학금 증액 등 크고 작은 학생들의 문제를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사회활동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는 정력과 노력으로 한국화재학회 회장, 한국교육시설학회 회장, 대한건축학회 회장으로 활약하셨습니다. 또한 건설교통부, 과학기술부, 교육인적자원부, 서울특별시 등 국가 관련기관의 각종 위원회에 적극 참석하시여 국가발전에도 크게 이바지 하셨습니다. 또한 한국과학기술단체 총 연합회 임원으로서 과학기술 교육정책과 교육행정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관계 요로에 과학기술 교육개혁을 위해 정열을 기울여 활약하셨으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으로 과학기술계 발전을 위해 쌓으신 인품과 덕망은 많은 교육자의 찬사와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이러한 학술적·사회적으로 국가에 공헌한 공적으로 서울시 문화상, 국민훈장 석류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하셨습니다.



 출생 및 가족


  과천 김진일 교수님은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영흥리 109번지에서 부 김순균, 모 서상복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1926년 1월 2일에 출생하셨습니다. 그 뒤 이수자 여사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김승제 교수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건축계획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광운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입학처장, 홍보처장, 대외협력처장, 대외국제처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대한건축학회 부회장으로도 활약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


  신상초등학교를 8살에 입학·졸업하셨으며 졸업 후 1년 뒤에는 평양실업학교를 입학·졸업하셨습니다. 평양에서 1944년 9월 18세에 군입대 통지를 받으시고 신상에서 함북열차로 회령 혹은 나남에 있는 사단사령부를 거쳐 부산에 도착 후 일본 시모노세끼를 통해 도쿄근처 치바현 아비꼬군 부대에 주둔하시다가 해방이 되어 1945년 12월에 귀경하게 됩니다. 그 뒤 1946년 4월에 평양시청 근처에 있는 평양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후 1948년 6월 25일 평양-해주-임진강-황해도 바닷가를 가로질러 월남을 하셨습니다. 월남 성공 후 이름을 김진봉에서 김진일로 개명하여 이북의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시고, 1950년 8월 7일 부산에서 육군소위로 입대하여 낙동강 상주 옆 구포전쟁에 참가하셨습니다. 9.28부터 진격하여 진천-수원-노량진-한강철교-서대문-임진강-개성-대동강 건너 평양을 북진하시다가 최전방 산정상 부근에서 국군복으로 위장한 인민군에 의해 오른쪽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깨어나 평양국군병원에 입원한 후 대구 육군통합병원으로 이송, 입원 후 퇴원하셨습니다. 그 때 군의관이 관통부상을 걱정하며 10년 정도 살 것이라 하였으나 그 뒤 50년 이상을 사신 것을 보면 그 의지가 대단한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과천 김진일 교수님은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남은 여생을 헌신한다는 각오로 교육계에서 봉사하셨습니다.



 교수 시절


  한양대학교 졸업 후 강윤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시면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을 설계하셨고, 그 뒤 김중업 설계사무소에서 설계한 부산대학교 건축물을 감리하면서 부산대학교와 인연을 맺어 교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셨습니다. 이후 모교에서의 교수 충원으로 한양대학교 건축과 교수로 이적하게 되시고, 일본 와세다대학 건축학과로 유학을 떠나 그 당시 어려운 환경이지만 값진 연구로 대학원을 수료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과천선생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진에게 보다 선진화된 학문을 보급하기 위해 한양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의 학술교류협정 기회를 만들어 이후 많은 한양대학교 후진들이 각 분야별로 유학의 길을 트게 하셨습니다. 이는 선진국의 학문을 접할 수 있게 한 공로로 후일 많은 분들에게 칭송을 얻게 됩니다. 귀국 후 선생님은 건축과 학부학생 뿐만 아니라 대학원생도 지도하시어 그 제자들이 전국 각 대학과 설계사무소 등에서 후진 교육은 물론 건설계 발전과 정책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양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기획관리실장으로 대학의 발전계획을 세우시고 과감히 집행하시어 대학 발전에 기반을 세우셨습니다. 이후 교양학부장을 하시면서 교양분야의 과목을 대폭 확충하시어 학생들에게 다양한 과목을 청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 뒤 학생처장으로 부임하시면서 학생들의 민원 상담소 개설, 장학금 증액 등 크고 작은 학생들의 문제를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대한건축학회 활동


  현재 70년의 역사와 회원 25,000명의 한국 최대의 대한건축학회에서 연구담당이사, 부회장, 참여이사를 거치면서 제 21대 회장에 취임하셨습니다. 그 때 제가 연구담당 이사로서 측근에서 모시고 수행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명동에서 학회회관을 강남의 과학기술회관으로 이전하여 학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2. 건축잡지를 처음으로 건축학회지와 건축논문집으로 분리 인쇄하여, 연구의 질을 상향시켜 국제적인 논문집으로의 위상을 확보하였으며,
3. 학술대회를 1년에 최초로 봄과 가을에 2회를 개최하여 많은 교수, 대학원생, 회사 임직원의 참여율을 높임으로 산학연협동의 활성화에 기여를 하였으며,
4. 대한건축학회 40년사를 최초로 기획, 발간하여 역사적인 건축 기록 정리에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특히 40년사에는 고인이 되신 많은 건축인의 업적 등을 정리하여 후진양성에 참고가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추후 건축학회 50년사, 60년사, 70년사를 발간하는 근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5. 국제교류의 일환으로 일본건축학회와 협정을 맺어 격년제로 회장단이 교체 방문하는 기회를 만들어 한일 양국 건축계의 발전 및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이러한 한일양국의 실질적인 학문발전 및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한국인 최초로 일본건축학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갖으셨습니다. 특히 일본건축학회 100주년 행사에 초대된 과천 김진일 교수님은 같은 단상에서 일본의 아키히토 천왕폐하와 기념식에 참석하신 후 느끼신 점은 일본은 건축문화창달에 기여하는 건축인을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그러한 부분이 미흡하다는 얘기를 우리 후배들에게 하시면서 건축인 여러분들이 위상제고와 문화창달에 더욱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계기가 되어 2004년에“건축의 날”이 제정되어 건축문화창달에 기여한 공로가 크신 건축가, 건설인, 교수 등에게 훈포장을 수여하는 행사로 발전시키신 공로가 있으십니다.



 한국화재학회 창립 및 활동


  인류 문명은 불과 함께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불을 빼놓고 인간생활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현대문명과 불은 불가분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잘못 다룬 불은 우리들에게 불의 재해라는 커다란 화로 등장하게 되며 불의 이용도가 높아질수록 불에 의한 피해도 광범위하게 되고 대형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이 불을 보다 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연구하여 그 실제적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평소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분들의 뜻을 한데 모아 과천선생님은 한국화재학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초대, 2, 3대에 걸쳐 회장을 하시면서 방화에 관련된 학술적인 연구, 조사, 연구발표회 개최, 국내외 관계기관과의 정보교류 및 학술지 및 도서의 발간 등을 통해 방화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로 그 피해를 줄여 인명 및 재산보호에 초석이 되도록 시도하신 공로는 큰 치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화재와 소방을 동시에 다루는 학회로 발전하게 하여 초고층건축물 화재예방 및 진압대책 등의 연구는 세계적으로 방재 안전 국가로서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육시설학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고 김진일 회장님을 생각하며
김진균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교육시설학회가 1993년 12월에 뜻을 같이하는 60여명의 건축인들과 교육학자, 교육행정가, 교육시설 관련 전문인들이 모여 교육시설에 관한 다학제적연구를 목적으로 창립 된지 올해로 어언 20년이 됩니다. 그 동안 고 김 진일 초대회장님의 각고의 노력으로 우리학회가 국내 유수의 학회로 성장 발전하게 된 것을 다함께 축하하는 바입니다. 당시 정보화, 세계화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대외적으로 WTO 출범에 따른 국내시장의 전면적 개방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교육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시설의 창출이 요청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산, 학, 연, 관, 협동을 통하여 좋은 교육환경제공을 위한 교육시설에 대한 연구와 학술활동이 시급하던 때였습니다. 이에 우리학회가 설립 된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한 판단으로 과천 선생님의 큰 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20년 전 학회 설립 당시 있었던 여러 일이 생각나지만 그 중에서도 작고하신 김진일 초대 회장님께서 초창기 학회를 위해 애쓰시던 모습이 각별하게 머리에 떠오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학회가 오늘의 버젓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김회장님께서 학회를 위해 기우린 노력과 정성에 비롯한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93년 여름 어느 날 필자는 회의 참석 차 강남에 있던 주택공사 본부에 갔는데, 그 자리에서 김회장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건축계 원로이신 회장님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뵌 적은 있었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데 회장님께서는 잠깐 보자고 하시며 교육시설학회 설립에 관한 이야기와 이에 곁들여 필자도 참여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 때 즉흥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 소장교수 이던 필자를 새로운 학회를 위해 함께 일할 사람 중 하나로 미리 꼽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 즈음만 해도 건축학계는 타 대학 교수들의 활동상황에 대해 잘 알 정도로 울타리가 넓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회장님께서도 이미 필자의 신상을 파악하고 계셨던 듯 했습니다.
  그 해 막바지에 여의도에 있는 사학연금회관에서 발기인 모임이 있었고 12월 27일에는 경기여고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학회 사무실은 당시 과학기술단체연합회에 관계하고 계시던 회장님의 주선으로 과학기술회관 내에 방 한 칸을 쓰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사무실이 좁아 회의가 있을 때는 같은 건물 내의 대한건축학회 회의실을 이용했으며, 추후 학회 활동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기게 된 것도 회장님께서 부지런히 발품을 파신 덕분이었습니다. 회의 공간을 갖춘 새 사무실로 이사한 후‘이제 됐다’며 흡족해 하시던 회장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초창기 교육시설학회의 회원은 건축학 설계 교수들과 교육공학 전공 교수들, 교육부 산하 교육청의 공무원들이 주축이었습니다. 한 때, 이질적인 분야의 구성원들 간의 견해차로 운영상의 마찰이 일었던 일도 있었지만, 회장님께서는‘학회는 학술단체다’라는 원칙으로 일관하시며 이를 무마하셨습니다. 필자는 회장님께서 곧은 심지로 단체를 통솔해나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장님께서는 처음부터 학회지 발간에 많은 힘을 기우리셨습니다. 잡지형식의 학회지‘교육시설’발간을 위해 자주 편집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회지발간의 풍부한 경험을 갖추셨던 회장님께서는 표지 디자인으로부터 각 페이지 내용을 글자 하나하나 몸소 꼼꼼히 체크하셨기 때문에, 필자를 포함한 편집위원들은 옆에서 손 놓고 구경만 할 정도였습니다. 계간으로 시작된 잡지는 회장님의 독려로 얼마 안가서 격월간으로 격상됐고 차츰 학술 논문지의 모습을 갖춰 나갔습니다. 당시 잦았던 집행부의 모임은 가끔 중국 음식점‘만보장’만찬으로 호사를 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무실 인근의 분식센터 급의 식당에서 소박한 저녁식사로 끝나곤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종종 회장님께서는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 등 격변기에 겪으신 인생역정 대하드라마를 실감나게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셨습니다.
  필자가 회장직을 맡았던 시기(2000~2002)에는 사적인 자리에서 자주 회장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학회운영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날이면 새벽같이 전화를 주시며 만나자 하셨고, 소찬을 들며 학회 발전에 관한 제안과 함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즈음, 7차 교육과정이 가져온 새로운 시설 수요로 한해에 7,80건에 이르는 계획설계를 우리학회가 수탁하는 호황도 누렸습니다. 전국 건축학과 교수와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연구 및 성과 발표회 시스템이라든가, 이들 연구의 과실금을 적립하여 해마다 전국의 교육청 시설담당 공무원의 재교육을 시행하고 해외교육시설을 견학시키는 공익사업 프로그램 등은 이런 자리에서 나온 회장님의 발상에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장님께서는 대학 보직교수직이나 여타 학회장직을 맡았던 경험에서 습득하신 단체운영의 노하우도 들려주셨습니다. 가끔 이야기가 옆길로 나가 주제가 다양해 질 때면, 필자는 회장님이 갖추신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소상한 기억력에 감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 중, 6.25 동란시 다부동 전투에서 총상을 입으신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가장 인상 깊은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가끔 필자는 투철한 애국심과 달변의 회장님께서 군인이나 정치지도자의 길을 택하셨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회장님이 기거 하시던 과천 자택은 늘 대문이 열려 있었고, 인사드리러 갈 때마다 인자하신 사모님께서 몸소 거실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거실에 앉으면 소박한 가구와 벽에 걸린 모친의 초상 흑백사진 한 점이 청렴한 선비의 소박한 삶을 말해 주는 동시에 이산가족의 애환 같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아마도 필자의 원적지가 회장님의 고향인 함경도라 평소 말씀하시는 억양에서 친밀감을 느낀 터에, 또 언젠가는 필자의 이름이 북에 있던 회장님의 동생 이름과 같다고 하신 적이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필자는 인생의 대 선배인 회장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필자도 회장님께서 교육시설학회 활동에 한창이시던 연배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필자는 외람되나마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대한건축학회를 비롯한 몇몇 단체에서 대표의 직무를 무난히 수행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이 회장님께서 친히 베풀어 주신 그분‘지도자 양성 코스(?)’의 개인교습 덕이 아닌가 합니다.
  때마다 보내오는 학회지‘교육시설’을 펼칠 때면‘남는 것은 오로지 학회지 하나 뿐’이라고 하시며 학회활동의 증거물로서 학회지의 중요성을 강조 하시던 고 김진일 회장님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20살의 어엿한 성년이 된 한국교육시설학회의 모습에 매우 대견해 하셨을 것입니다.


 


학력 및 경력


果川 金 眞 一 (구명 김진봉, 세례명 베드로)
1926년 1월 2일 생 (음력 1925년 11월 18일)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영흥리 109번지
본관 : 경주 김씨
조부 김원섭 조모 강씨
부 김순균 모 서상복 사이에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미망인  이수자
장남  김승제   며느리  정민구    손자    김주형    손자    김주한
장녀  김경희   사위    고광민    외손녀  고현희    외손자  고성훈
차녀  김경화   사위    김정수    외손녀  김성은    외손자  김우석


1946. 4  평양공업전문학교 건축과 입학
1948. 6  북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탈출
1949. 4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입학
1950-1955 종군(육군대위 예편)
1953. 3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2회 졸업
1955  강윤 건축설계사무소 근무
1956  김중업 건축사무소 근무
1958. 4  부산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전임강사
1962. 9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
1966-1967 일본 와세다대학교 대학원 수학
1968-1971 한양대학교 기획관리실장
1971-1972 한양대학교 교양학부장
1972-1973 한양대학교 학생처장
1983-1985 대한건축학회 회장
1986-1992 한국화재학회 초대, 2, 3대 회장
1993-1995 한국교육시설학회 회장
1991-2003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감사
1959-1980 부산사범대학, 수도여자대학, 연세대학 강사


1968  1급건축사
1972  공학박사(한양대) 취득
1991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991  대한건축학회 명예회장
1995  한국교육시설학회 명예회장
1994  일본건축학회 명예회원
1995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 수상 >
1952  화랑무공훈장 수훈
1978  대한건축사협회 학술논문상
1986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87  대한건축학회 학회상 수상
1991  국민훈장 석류장 수훈


< 저서 >
1975  건축계획 결정방법, 보성문화사
1976  과천 건축수기, 문광사
1983  건축계획론, 보성문화사
1997  요점. 건축계획, 보성문화사


< 작품 >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설계
부산대학교 본관 건물설계 및 감리 등 다수


< 연구업적 >
∘ 석굴암에 관한 연구, 가로경관에서 Facade의 Flux현상에 관련된 연구 20여편
∘ 농촌취락의 집락구조연구 10여편
∘ 교육시설연구로 대학시설기준, 교육시설 Module에 관한 연구 10여편 


 



[추도특집]


故 果川 金眞一 名譽會長을 추모하며
Revering the Memory of Emeritus President of AIK, Kim Jin-Il
서붕교 (경원대 교수)


  대한건축학회 명예회장이신 김진일 한양대학교 명예교수께서 지난 2008년 3월 16일 오전 8시 20분에 타계하였습니다. 향년 82세이셨습니다. 건축계의 발전을 위해 항상 올바른 길에 앞장서 계셨던 김진일 명예회장의 급작스런 타계는 모든 건축인의 슬픔이었습니다. 2008년 3월 18일 오전 7시 30분 강남 성모병원에서 가톨릭의식으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고 이어서 영결식은 대한건축학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학회 이찬식 총무이사(인천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에는 심우갑 대한건축학회 회장님과 이리형 청운대학교 총장님의 추도사가 있었으며, 건축계의 원로들과 학회 임원진, 한양대학교 동문, 제자 등 300여명의 지인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고 과천 김진일 명예회장은 6.25에 육군소위로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부터 참전하여 그 공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하여 국립대전 현충원 장교묘역(8085호)에 장남 김승제(광운대 교수)와 가족친지, 심우갑 회장님,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되었습니다.
  1926년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3년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건축실무분야에서는 강윤선생 건축사무실과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이화여대 강당, 부산대학교 효원본관 설계 등에 참여하고, 학계에서는 부산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2년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어 후학양성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한양대학교 재직중에는 교양학부장, 학생처장, 기획관리실장 등 대학발전을 위하여 많은 봉사를 하였으며 연구활동으로는 석굴암연구, 가로경관에서 Facade의 Flux현상에 관련된 연구 20여 편, 농촌취락의 집락구조연구 10여 편, 또한 교육시설연구에서는 대학시설기준, 교육시설 Module에 관한 연구 등 10여 편의 업적을 남기셨으며 1994년에는 한국교육시설학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87년에는 한국화재학회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정년 후에도 건축학회 창립회원이셨던 건축가 고 강윤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여, 공주영명학교, 일본의 유학생활을 조사·발표 등의 정열적인 연구활동은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건축학회를 위해 연구이사, 참여이사, 부회장,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봉사하셨으며, 특히 학회사무국을 명동에서 역삼동 과학기술회관으로 이전과, 학회지를 논문집과 학회지로 분리 발간하는 업적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대한건축학회 40년사를 발간하시고 일본건축학회 100주년 행사에 참가하시어 한·일 건축학회의 진정한 협력관계를 정립하여 1994년에 일본건축학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과 공로로 서울시 문화상, 대한건축사협회 논문상, 대한건축학회 학회상, 국민훈장 석류장, 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셨습니다. 우리건축학회는 고 과천 김진일 명예회장님의 학술활동과 사회활동을 높이 기리며 이에 추모특집을 마련하여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삼가 추모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심우갑 (대한건축학회 회장)


  우리 대한건축학회의 제21대 회장을 역임하셨던 우리나라 건축계의 큰 어른이신 고 김진일 명예회장님의 서거를 당하여, 유가족 여러분께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비통한 마음을 담아 삼가 선생님의 영전에 이 조사를 바칩니다.
  지난 주, 친구 분이시자 동료교수이셨던 이해성 한양대학교 명예총장님께서 타계하시자, 몸소 차를 운전하시고 그분의 영전에 오셔서‘어찌 나를 두고 먼저 떠나는가’하시며 대성통곡하셨다는 말씀을 전해듣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는데, 이제 단 며칠 후에 그 친구분의 뒤를 따라 이렇게 홀연히 가시다니, 뒤에 남은 저희 후배들과 제자들은 허망하고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습니다.
  선생님께 암울한 일제 치하였던 1926년에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출생하신 후 영욕의 세월을 치열하게 살아오신 우리나라 현대사의 산 증인이셨습니다. 일제에서 해방된 지 2년 만에, 재학중이시던 평양공업전문학교를 뒤로 하고 공산치하를 탈출하여 홀로 서울로 오시어 한양대학교에 입학하셨으나, 다시 3년 후에는 6.25전쟁을 당하여 육군 소위로 전투에 참전하시어 그 유명한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시고 후에 화랑무공훈장까지 서훈 받으셨습니다. 연이어 북진하시어 학창시절의 꿈이 담겨있는 평양을 지나 압록강 가까이까지 가셨지만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중에 벌어진 전투에서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시다가 구사일생으로 회생하게 되신 일을 선생님께 여러 번 들어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육군 대위로 전역하신 후 1953년에 한양대학교를 졸업하시고 건축설계 실무에 종사하시다가 부산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2년에 모교인 한양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신 이후 근 30년간 후진의 교육과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셔서 우리나라 건축계의 수많은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셨고, 대한건축학회의 이사, 부회장,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학회 발전의 기틀을 튼튼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뵙던 때를 기억합니다. 건축학회의 새내기 이사로 떨리는 마음으로 이사회에 처음 참석했을 때, 학회의 원로 중의 한 분이셨던 선생님께서 현안에 대해 열정적으로, 또한 논리 정연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아... 이분이 이런 분이셨구나’생각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었죠. 그후 건축학회와 교육시설학회의 활동에 참여하게 될 기회가 많아지면서부터 선생님과 개인적으로 만날 때가 많아졌고, 선생님의 인품과 명석한 판단력과 뛰어난 기억력 등에 감탄하며 서너 시간씩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씀을 때로는 지루하지만 그러나 늘 재미있게 듣던 날들을 기억합니다.
  학교의 제자도 아닌, 건축계의 한 후배에 지나지 않던 저에게 주셨던 관심과 사랑을 이제 또 누구에게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참 정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오실 때 헤어졌던 모친의 말씀을 하시며 팔순의 노인이 흘리시는 눈물을 보면서 저도 함께 눈물을 흘렸었죠.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북에 있는 동생을 꼭 만나고 싶다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에 저도 함께 안쓰러워하던 기억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일제의 고난 속에서 성장하시고, 전쟁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계셨고 전후의 피폐함을 몸소 겪으셨지만,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건축계의 기초를 닦으시고 이만큼 성장하는 과정을 내내 함께 하신 분이라는 점에서 감히 성공한 삶을 사신 행복한 분이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짧다고만은 할 수 없는 82년의 수를 누리셨지만, 너무도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선생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유가족은 물론이요, 우리의 건축계 모두가 큰 어른을 잃은 슬픔과 비통한 마음 억누를 길이 없지만, 이제 선생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평안한 안식을 얻고 계실 것으로 믿으며 뒤에 남은 저희들은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습니다.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하늘나라의 평강을 누리십시오.


 


故 金眞一 선생님 영전에
이리형 (청운대 총장)


  삼가 김진일 선생님 영전에 올립니다.
  오늘 우리 건축인들은 우리나라 근대 및 현대건축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그리고 우리들이 항상 존경하여 마지않는 건축계의 원로 과천 김진일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서거를 접하여 슬픔을 가누지 못하면서 애절한 마음으로 교수님의 마지막 떠나시는 길을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선생님! 바로 며칠 전 고 이해성 한양대학교 명예 총장님 상가에 건강한 모습으로 문상을 오셨는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항상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온 한양 동문 1만여명은 물론 건축학회 1만6천여 회원은 선생님의 운명소식에 그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이렇게 모두들 선생님의 마지막 떠나시는 길을 지켜보고만 있노라니 더욱 복 받치는 슬픔을 금할 길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26년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출생하시어 혼란스러운 역사 속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수난의 시절을 보내시고, 6.25 동란때 학도병으로 입대하시어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 소대장으로 참전. 치열한 전투 끝에 혜산진까지 전격하는 쾌거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가슴에 총탄을 맞으시고 기절하신 후 소생하신 전쟁담은 우리 모두에게 감동과 슬픔을 느끼게 하는 비극적인 내용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몸에 총알을 묻은채 선생님께서는 한평생 육체적 고통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그야말로 헌신하신 것은 민족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선생님께서는 국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하셨습니다.
  그 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건축후학 양성을 위해 부산대학교에서 교육과 연구를 시작하셨으며, 그 후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몸담으시며 우리나라 건축계를 이끌어 갈 후학들에게 건축교육과 건축문화창달을 위하여 평생을 사랑과 애정을 쏟으신 것은 후학들의 크나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한양대학교 교양학부장을 비롯하여 학생처장,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임하시면서 대학발전에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으로 오늘의 한양대학교 발전의 초석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한국교육시설학회와 한국화재학회를 설립하시어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신 후 이 분야 발전에 굳건한 기틀을 구축하셨으며, 대한건축학회 회장으로 취임하신 후에는 사무실을 명동에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관으로 옮기신 후 건축잡지를 처음으로 논문집과 잡지로 분할하여 출판하였으며 봄·가을 개최되는 학술발표 논문집을 개선하여 교수와 연구원, 학생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을 만드셔서 후진들에게 많은 찬사를 받으셨으며, 학회 창립 40년사를 발간하여 학회의 모든 정보를 총정리 하는 등 열정적인 자세로 학회발전에 봉사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건축발전을 위하여 한일간의 활발한 학술교류를 통해 건축계 발전에 기여하셨으며 한일 양국간의 국제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건축학회 명예펠로우로 추대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가시는 날까지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와 학회의 명예회장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 명예회원으로서 우리 건축인의 나아가야 할 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조언해 주셨고 언제나 건축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시면서 이 나라 교육계와 건축계의 크나큰 업적을 남기시여 서울시 문화상과 대한건축학회 학술상, 국민훈장석류장 등을 수훈하셨습니다.
  비록 선생님의 육신은 속세에서 타계하셨습니다만, 그 영혼과 정신은 우리 건축인 모두의 가슴과 건축계에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이제 후학들은 선생님의 평소 뜻을 언제나 가슴 깊이 새겨 담아 학회의 발전은 물론, 이 나라 건축문화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평안히 가시옵소서!


 


景慕故果川金眞一先生朞年
경  모  고  과  천  김  진  일  선  생  기  년  


墻角梅花滿發天   담 모퉁이에 매화꽃이 가득 피는 날에,
장 각 매 화 만 발 천


隨朋仙化已朞年   친구 따라 가신지 벌써 일 년이 되었네.
수 붕 선 화 이 기 년
 
親知景慕參享祀   친지들이 추모제에 참석하여 그리워하니,
친 지 경 모 참 향 사 


魂魄猶還共會筵   혼백이 돌아와 모인 자리에 함께 계신 듯.
혼 백 유 환 공 회 연


戰地英雄惟救國   전쟁 영웅으로 오로지 조국을 구하시고,
전 지 영 웅 유 구 국


學林師傅養多賢   학계의 스승으로 많은 현재를 기르셨네.
학 림 사 부 양 다 현


終生建築精誠盡   종생토록 건축에 모든 정성 바치셨으니,
종 생 건 축 정 성 진


英顯遺蹤萬歲傳   고인이 남기신 자취가 길이 전케 하소서!
영 현 유 종 만 세 전


 


선생님 영전에서 옛일을 추상하니 그리워 삼가  졸시를  바치면서 명복을 비옵니다.



2009年 己丑 3月 15日 
弟子 李特求 再拜


 


학문보다 조국을 더 사랑하신 선생님
-과천 김진일 선생님을 추모하며-
민영진 (예종합건축사사무소 소장)


  봄기운이 어렴풋하던 지난 3월 일요일 아침 느닷없이 접한 선생님의 비보에 어쩔 줄 몰라 당황해 하면서도 순간 많은 추억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참전시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항상 건강을 염려하시면서도 뜨거운 열정과 왕성한 체력으로 근일까지도 평안히 생활하시는 모습을 뵈었는데 갑자기 훌훌 떠나버리시니 이 서운하고 아픈 마음을 어찌 비하며, 저희의 마음은 모두 절망감뿐입니다.
  되돌아보면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이 35년전, 연구실 문하생으로 입문하면서 학문의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으로서, 따스한 정을 주시는 아버님같은 어른으로서 오랜 세월의 인연을 간직해왔는데 일순간 무너져 내리니 너무도 짧고 허무한 세월이 무심하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제가 다니던 학창시절 선생님께서는 교내외의 많은 직책과 활동으로 분주하시면서도 학문적 연구와 논문에 소홀함이 없이 과중한 연구과제를 주시며 항상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연구실 환경을 만들어 주셨고 그로 인해 저희 연구생들은 밤새워 논문자료, 조사 보고서 등 벅찬 연구실 생활을 하며 학문적 발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연유로 연구실 선후배간의 우의와 정이 전통적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일연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어느 사회 모임보다도 값지고 유익한 자랑스러운 모임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항상 선생님께서 계셨고 그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한 방학중 연구조사차 농촌을 방문할 때에는 연구조사 외에도 농촌봉사 활동을 겸하여 노력봉사 외에도 학교와 사회단체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조성하셔서 당시 어려운 농촌 경제생활의 자립과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시던 학자이전에 훌륭한 사회의 지도자이셨습니다.
  70년대의 대학생활은 이념과 체제의 갈등 속에서 잦은 데모, 휴교 등으로 젊은 가슴에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그때마다 선생님께서는 투철한 국가관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정치적 상황의 해석과 국가의 진로 등 당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바른 가르침으로 저희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시고 인생의 지표설정에 많은 보탬을 주셨습니다. 강의실이나 연구실에도 건축에 관한 얘기뿐 아니라 참전경험, 다양한 군 전술전략, 생과 사의 고비, 혁혁한 전공, 처세술 등 건축 외적인 가르침으로 많은 흥미와 삶의 지혜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저에게도 자랑스러운 육군장교로서 군생활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을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할 즈음 설계실무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선생님의 알선으로 박춘명 선생님의 문하에 들어와 현재까지 설계업무를 해오고 있지만 틈틈이 프로젝트에 대한 아이디어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며 더불어 학문적 관심과 연구하는 자세를 소홀히 할 수 없도록 평생 일깨움을 주셨습니다.
  특히 63빌딩 설계 당시 국내의 어려운 여건임에도 선생님께서는 앞장서시어 많은 자문위원들을 독려하여 헌신적인 자문활동으로 무사히 설계를 마칠 수 있었던 일이 새삼 기억이 새롭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타학문과의 교류, 타산업분야와의 상호 공동연구 등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학문의 개척자로 열정적이셨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주저앉거나 낙담하시지 않고 새로운 창조적 도전정신으로 건축계의 지워와 권위향상, 학문적 토대 구축을 위해 평생을 사셨습니다.
  이는 후학들의 귀감이 되어 현재 많은 제자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터전과 원동력이 되었음을 저희 모두가 고맙게 생각하는 일입니다.
  은퇴하신 후에도 텃밭과 정원을 가꾸시며 유난히 흙을 사랑하시던 선생님, 청계산의 과천동산에 밤나무를 심으셔서 함께 밤을 따며 늘 두고온 고향, 부모형제를 그리시던 선생님, 그 외로운 모습 이제는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손수 재배하신 채소들로 차린 점심을 먹으며 재미있게 정담을 나누시던 그 모습, 늘 대문을 열어두고 오는 사람 반갑게 맞아주시던 그 모습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홀로 남으신 인자하신 사모님 그리고 가족들 모두 함께 변함없이 어머님처럼, 가족처럼 어울려 정겹게 살아가겠습니다.
  아마 학문보다 더 조국을 사랑하셨기에 조국의 품에 묻히시길 원하셨고 끝까지 나라를 지키시기 위해 전우들이 잠든 국립대전현충원으로 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떠난 텅빈 자리 저희 남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바르게 계승하여 훌륭한 열매가 맺도록 한층 정진하겠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과천 앞마당에는 봄꽃이 활짝 피었건만 꽃의 웃음도 선생님의 인자하신 모습도 뵐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가시는 길 허전한 마음 아래의 시(천상병 시인의 귀천)로 위로 드리려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며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가슴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름답게 한평생을 사신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과천선생님을 그리며...
이상림 (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 회장)


  올해는 유난히 건축계에 계신 분들의 슬픈 소식이 많습니다.
  유럽 출장중 잠결에 받은 전화 메시지는 너무도 갑작스런 소식이었습니다.
  삼가 과천 김진일 선생님의 영전에 애도의 마음을 바칩니다.


  #1. 한양대학교 행당동 캠퍼스. 2학년 건축계획 수업이 있던 1975년 봄.
      건축계획 수업 시간에 학교 수업시간표를 짜라는 교수님의 말씀에 나는 속으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업 시간표를 짜야 하지?”라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2. 석사논문을 지도 받던 1981년 중반. 사무실을 다니며 병행 하는 공부가 그렇듯 항상 시간과 노력이 미흡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평생에 간직해야 할 여러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3. 과천에 주택을 완성하신 1981년. 이렇게 조용하고 양지바른 곳에 집을 짓게 되신 경위와 얇은 지붕의 슬래브를 어떻게 구현하셨는지를 여러 차례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하나의 건축물 이전에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4. 일본건축학회 100주년 기념 방문을 하고 돌아 오셔서 일본 학회의 열의와 단결 그리고 졸업 후 많은 시간이 지난 분들도 학회에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헌신하는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일본의 천황이 되신 아키히토(明仁) 황세자의 감동 어린 대접에 관해서도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건축이 일본에서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한숨을 섞어가면서 얘기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5. 원광대 특강을 마치고 90년대 초반 잠시 들린 곳에서 선생님의 끔찍한 손자 사랑을 목도 했습니다. 전화로 천자문을 손자에게 가르치시는 열정에 저는 두 손을 다 들었습니다.
  #6. 학교 정년을 마치시면서 평생 관심의 대상이셨던 학교 건축에 좀더 관심을 기울이시고자 한국교육시설학회를 1993년에 과총에서 설립하셨습니다. 그때의 열정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7. 올해 초 건축학회회관에서 있었던 신년회에서 비교적 건강하신 모습의 선생님을 보았습니다. 저의 손을 꼭 잡으시며“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송구스러웠던 때가 불과 몇 달 전입니다.
  #8. 국립 대전 현충원 장교묘역 8085호 선생님의 묘소에 서서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지난 30여 년을 되돌아봅니다.


  항상 못난 자식들이 그러하듯 세상을 떠난 어른을 그리워하며 후회를 합니다. 지나고 나면 후회할 것을 다 알았건만 또다시 후회할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시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묘역에서 마지막 말씀을 올립니다.
  부디 평안히 잠드소서. 삶 다음의 삶도 이승에서와 같이 열정적으로 사시기를 빕니다. 


 


弔  辭
 사이토 마사오 齋藤公男
 (일본건축학회 회장)


  본회의 명예회원이신 대한건축학회 명예회장 김진일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고에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선생님께서는. 1986년 4월 본회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대한건축학회 회장으로서 참석하시어, 한일 양 건축학회가 건축이라는 공통된 테마를 추구하는 단체로서 서로의 이해관계의 틀을 깨고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은 한일 양 학회 교류의 교량 역할로서 지대한 노력을 해오셨습니다. 일본건축학회에서는 이러한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1990년에 명예회원으로 추대한 바 있으며, 그 이후로도 선생님으로부터 크고 작은 지도를 받아왔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대한건축학회와 일본건축학회는 조직이나 기능상으로 유사성이 있으며, 여러 가지 공통의 과제를 갖고 있습니다. 양 학회 모두 건축과 관계되는 학술, 기술, 예술의 발전,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학술면에서는 그 대상의 범위가 주변영역에 펼쳐져 폭 넓은 학제화가 진전되고 있습니다. 기술면에서는 환경오염, 자원, 에너지 문제 등을 세계적 규모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어, 더욱더 기술의 종합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술면에서도 각국의 토지의 역사, 풍토, 전통을 지켜가면서 다양한 가치관을 허용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일 양 건축학회가 이러한 과제의 해결에 대하여 보다 더 제휴하고 협력하는 것은 실로 의의 깊은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한일 양 건축학회의 향후 상호친선과 학술교류 역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으나, 갑작스런 부고를 접하여 참으로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선생님께서 한일 양국의 건축계의 발전에 힘써 오셨던 위대한 공적을 그리워하며, 3만 6천명의 일본건축학회 회원 모두가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심심한 조의를 표하며 명복을 기원드리는 바입니다.


 


金眞一 先生 追悼
 스즈키 시게후미 鈴木 成文 
(도쿄대학 / 고베예술공과대학 명예교수)


  김진일 선생이 급서하셨다는 사실을 지난밤 서울에서 전화를 받고 매우 놀랐습니다. 바로 지난주에는 손녀딸의 일본에서 대학원 유학에 대하여 건강한 목소리로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더욱 놀랐습니다.
  매년 정월 초하루 아침에는 「서울입니다」라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 인사를 주시곤 하였습니다.
  벌써 20년 이상 지나간 일입니다만, 일본건축학회 백주년기념으로 아시아국제건축심포지엄을 개최하였을 때 김진일 선생은 대한건축학회 회장으로서 일본을 방문하시어 한국건축 사정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건축가 보리스의 추적 연구에 대해서도 한국과 일본에 오가시면서 정중하게 자료를 추적해가는 모습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선생은 진심으로 일본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전람회를 관람하러 간다던지, 일본 요리도 좋아하셨습니다. 본인의 자택에서 냄비요리를 접할 때에는 한국과 일본의 냄비요리에 대하여 서로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의견을 들려주신 즐거운 추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옳은 것을 옳다고 주장하시고, 오늘날 사회의 비뚤어진 움직임과 정상적이 아닌 풍조에 대하여 언제나 엄격한 눈으로 지적하시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자세에서 저는 많은 점을 배웠습니다.
  선생의 타계, 진심으로 서글픔을 금할 길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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