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부 - 故 김병로 박사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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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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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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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오선근 (화학연구원)
1. 한 인간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언제 어디서 그가 태어났는지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태어나서 자라는 대도시의 아이들은 서로 공유하는 환경이 같기 때문에 비슷한 삶을 살지도 모른다. 
전쟁과 같은 엄청난 격랑이 몰아치고 삶과 죽음이 바로 옆 자리에서 갈라지는 시대가 아니라면 그저 평탄한 삶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언제 어디서 그가 태어났는지가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김병로 교수(이하 존칭 생략)는 1935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평안남도 대동군 양화면 평리.
일제강점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질곡의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시대와 육이오사변(한국동란)을 겪었다. 
지리적으로는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의 커다란 아픔을 겪었다. 
그런 시대에 그런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 역정은 분명히 그 이후 60년대에 태어난 세대와는 다를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도 김병로의 인생 역정은 더욱 남다르다. 
왜냐하면 그는 본질적으로 고향을 영원히 잃어버린 유랑자이기 때문이다.
1935년은 좀 아슬아슬한 해였다.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육이오사변에 끌려 나갔을 수도 있었고 태평양전쟁에 징용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35년생이라 초등학교 때 해방을 맞이하였고 중학생 때 육이오사변이 터졌다. 
1950년 여름에 남쪽으로 내려간 전선은 곧 북쪽으로 밀렸고 그해 겨울에는 거의 압록강까지 전선은 올라갔다. 
중국이 참전하자 전선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서 38도 분단 경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두 해 뒤인 1953년에 휴전이 되었다. 
전쟁 발발 이듬해에 김병로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평양 제1중학교와 제1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모든 고등학생들은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김병로는 체구가 작았다. 
워낙 자그마한 몸매라 군대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만일 휴전이 되지 않고 전쟁이 계속되었더라면 김병로도 군대에 입대하였을 것이다. 
한없이 질질 끄는 소모전에는 체구가 작다고 제외되지 않았을 것이고 김병로도 자기키 만한 AK 보총을 들고 어느 전선에 투입되어 인생을 마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휴전이 되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쪽에서는 남쪽대로 먹고 살기에 바빴고 북쪽에서는 북쪽대로 피폐해진 삶을 추스르고 있었다. 
형편은 남쪽이 조금 더 나았다고 볼 수 있었다. 
북쪽은 식량이 부족했고 복구사업에 투입될 인력도 부족했다. 
전쟁의 와중에 남쪽으로 피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병로의 집안은 피난하지 않고 평양에 그대로 있었다. 
김병로는 1954년 대학에 입학하였다. 
김일성대학이었다. 
김일성대학은 주로 공산당 간부의 자제들처럼 특권층만 입학하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의문이 생겼다. 
“그럼 교수님은 출신이 좋으셨습니까?”
내가 물었었다.
여기서 출신이라면 공산당원이냐는 물음이었다.
평양 제1중학교에 제1고등학교에 아이를 보낼 정도였으면 집안이 빈농이거나 소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동자 출신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야. 출신이 좋기는.”
“거기는 공산당원만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공부를 잘했다고 들어간 거지.”
“공부만 잘한다고 뽑아주었습니까?”
“그야 명색이 대학인데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몇몇 있어야지.”
“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진짜로 공부를 잘하셨군요.”
나는 의문이 좀 남았다.
“그래도 학생들은 모두 공산당원이거나 공산당원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원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고.. 특별한 신분이니까..”
같은 김일성대학 학생이라고 똑같은 신분이 아니고 차이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그랬어.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지.”
그때 남쪽은 미국의 도움으로 구호물자들이 들어오면서 전쟁의 폐허를 지우고 있었고 북쪽은 소련의 도움으로 복구사업을 하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을 돌이켜 보면 당시의 경제사정은 오늘날과 반대로 북쪽이 더 나았다. 
일제강점시대에 북쪽에 수풍발전소와 흥남비료공장 등 공업시설을 건설한 반면 남쪽은 전형적인 1차 산업인 농업에 치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직후의 형편은 북쪽이 그나마 덜 힘들었다.
경제사정이 좀 나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북한에서는 김일성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을 선발하여 소련과 동독으로 유학을 보냈다.
대학 1학년인 김병로도 선발되었다. 
“공부를 잘 하시긴 정말 잘 하신 모양이네요,, 하하” 
“못하진 않았지.. 하하”
김일성 정권의 태도는 전혀 뜻밖이었다.
한 사람의 인력이라도 더 재건의 현장에 투입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국가유학생을 선발해 보낸다는 것은 엄청난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자기 국민에게 잘한 일도 있었군요.”
오로지 독재자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의 다른 면모를 발견한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좀 놀랐다. 
그러나 김병로의 회고는 달랐다.  
“꼭 그런 게 아니라고 볼 수 있어. 소련에서 사람들을 보내라고 요구했을 수도 있으니까. 북한으로써는 거절할 수 없었고.”
“그래도 김일성대학이라면 최고의 고급 인력 아닌가요?”
“그러니까 소련에서 그렇게 요구했겠지. 데려다가 써 먹으려고.” 
김병로는 회고하였다.
“어떻든 여기 계시게 된 것은 김일성 덕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데 서독으로 망명하셨으니 북한에서는 교수님을 퍽 괘씸하게 생각했겠습니다.”
“물론이지.”
국가유학생이라고는 하지만 북쪽에서 학비를 기대할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면 그때부터는 소련 책임인 그런 유학이었다. 
그래도 국가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전쟁으로 사람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던 차에 선진국이던 소련과 동독으로 유학가게 되었으니 자부심과 희망에 가득하였다. 
1954년 초여름, 김병로와 약 20 명의 학생들은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평양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전쟁이 끝나고도 몇 년간 북쪽의 사회 인프라가 여전히 미비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가유학생이라 해도 공산주의 사회에서 여행이 거의 통제되었었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밤낮을 쉬지 않고 최대한 신속하게 여행하여 사흘 만에 겨우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평양역에서 어떻게 가족들과 헤어졌는지는 여쭈어보지 못했다. 
떡과 주먹밥과 삶은 계란 정도는 손에 쥐고 떠났을까?
아니면 북한의 화폐를 교복 안쪽 주머니에 몇 장 깊숙이 넣고 떠났을까?
아니면 삼엄한 경계 속에 딱딱한 분위기의 이별이었을까? ‘
“열심히 잘 해라. 금의환향해야지.”
“예.”
“몸 다치지 마라.”
“예.”
이런 말들을 나누었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가 김병로와 가족들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누님 되는 분이 그 이후 어떻게 해서 중국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고 한다. 
김병로는 누님을 가끔 만났다.
나머지 가족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2. “내 나이가 벌써 쉰다섯이 넘었으니 10년 안에 통일이 된다 해도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거야.” 
이 이야기는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90년에 나누던 이야기다.
독일이 통일을 향해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던 1989년 초에는 이미 동독 사람들은 자유롭게 서독을 여행할 수 있었다. 
그때 동독 사람이 첫 서독 방문인 경우에는 동독과 서독의 경계를 넘는 순간 서독 관리가 Begrüßungsgeld (Welcome money)라고 해서 지금 돈으로 약 10만원에 해당하는 100 서독 마르크의 현금을 동독 사람들에게 쥐어 주었다. 
수 만 명인지 수십 만 명인지 동독에서 건너와서 그 돈으로 서독 물건도 사고 지내다가 갔다.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정식으로 통일을 이루기 직전의 일이었다. 
독일의 통일은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산사태처럼 독일을 뒤덮고 있었던 때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며 이듬해인 1990년 5월 18일에는 경제적 통합을 위한 조약이 맺어졌고, 재통일을 위한 조약은 8월 31일에 조인된 뒤 9월 20일에 동서독에서 각각 승인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동독은 하나의 독일로 재탄생하였다.  
아헨공대의 본부 건물을 비롯한 연구소와 단과대학은 아헨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물리학과 건물은 따로 떨어져 약간 변두리 지역에 있었다.
주변은 눈부시도록 푸르른 목장지대였고 언덕위에 우뚝 서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띠는 노란색이 주조인 아방가르드 디자인의 건물군이었다.
그 건물군에는 제1물리연구소, 제2물리연구소, 제3물리연구소 A, 제3물리연구소 B 등이 모여 있다. 
김병로가 속한 제3물리연구소 A는 그 건물군의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병로의 연구실은 4층(우리 식으로 5층)에 C 윙 쪽으로 있었다. 
복도의 양쪽으로 방을 배치한 스타일인데, 한쪽으로는 김병로 이외에 Rudolf Rodenberg, L.M. Sehgal, Dieter Rein 등의 교수들의 연구실이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학생들의 연구실이 있었다.  
마침 내가 방문했을 때 Rein이 포도주를 들고 김병로를 찾아왔다. 
“This is my promise.”
Rein이 포도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김병로와 Rein은 독일의 통일의 시기에 대하여 내기를 하였었는데, 김병로는 그해 안으로 통일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반면, Rein은 해가 바뀔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그래서 포도주를 걸고 내기를 하였다. 
물론 Rein이 틀렸기 때문에 포도주를 들고 김병로를 찾아 온 것이다. 
기분 좋은 내기였다.
이기든 지든 독일이 통일된 것이다. 
이때 한국의 이야기도 물론 나왔다. 
베트남도 통일되고 독일도 통일을 이룬 마당에 이제 한국은 지구 위에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였기 때문이다.  
“I bet that two Koreas will unite within five years.”
Rein이 말하자 김병로는 10년 안에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일성이 살아 있는 한 남북한의 통일은 안 될 것이야.”
독일의 통일에 대한 내기와는 반대로 김병로가 신중론, Rein이 낙관론을 주장하였다.
“Okay, if two Koreas would not unite within five years, I will buy another wine.”
Rein이 말했다. 
물론 Rein은 또 틀렸다.
지금 2015년이 되어도 한반도의 통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이지 않는가.
아마 21세기가 시작될 즈음에 Rein이 다시 포도주를 들고 김병로를 찾아갔을 것이다.
이때는 포도주의 맛이 씁쓸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분 좋은 내기가 아니라 우울한 결과를 가지고 승패가 갈렸기 때문이다.
김병로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하여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전혀 통일을 기대하고 있지 않다가 갑자기 통일이 되었을 때의 그 엄청난 희열과 환희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평양에 두고 온 가족과 일가친척을 만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하여 짐짓 통일이 되지 않는다는 핑계를 되뇌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실향민과는 아주 다른 멘털리티를 갖고 있었다.
실향민들은 고향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지 않은가.
언제든 통일이 되기만 하면 고향을 찾아가는 것, 그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실향민이라면 김병로는 실향민이라기보다 차라리 최인훈의 광장의 주인공과 비슷했다.
나는 김병로가 평양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를 하거나 평양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가끔 지나가는 말로 한 두 마디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객관화된 제3자적인 독백을 들을 수 있었다. 
3.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다시 보름 가까이 걸렸다.
지금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6일이면 주파하는 거리다.
한국에서 유럽 여행을 하는데 일부러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침대칸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병로가 탔던 열차에 그런 낭만은 없었다.
고단하고 힘든 소련의 극동 기지에 오고 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만 가득했다. 
김병로를 비롯한 20여 명의 북한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에 대한 낭만 가득한 상상은 불가능한 호사였다.  
짧게 깎은 머리에 부실한 옷차림이었지만 단지 북국의 기온 때문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두려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불안 때문에 그들은 이를 악물고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열차의 리듬과 진동에 귀가 먹먹해질 쯤 되면 열차는 한 번씩 정차하였다.
식사 배급을 열차 안에서 할 때도 있었고 정차한 역에 내려서 할 때도 있었다. 
어떤 때는 어스름 저녁에 정차하였고 어떤 때는 새벽녘에 정차하였다.  
정차할 때마다 그들은 역에서 내렸다. 
초여름이었지만 내릴 때마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의 몸을 포위하듯이 감쌌다. 
낯설고 축축한 공기였다. 
그리고 싸늘하였다. 
그들은 땅을 딛고 서서 기지개를 하고 몸을 구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우리 절반 정도 온 건가?”
“여기가 바이칼 호 부근일 텐데.”
둥그렇게 둘러서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러시아어는 해방 이후 중학교에서부터 배웠으므로 역 이름 정도는 충분히 읽었다. 
역에 붙어 있는 지도를 보면 모스크바에 얼마나 가까워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털이 굼실굼실하게 손등까지 뒤덮고 팔뚝이 웬만한 한국사람 허벅지만한 남자들도 있었고 몸집이 엄청 뚱뚱한 할머니와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눈이 파랗고 피부가 유난히 흰 여자들도 있었고 제복을 입은 관리와 군복 차림에 가죽 장화를 신은 장교와 병사들도 있었다. 
김병로와 친구들은 그런 러시아인들 틈에서 다짐하였다. 
“잘 해보자구.”
평양에서 멀어질수록 외로움에 빠져드는 것을 떨쳐버리고자 그들은 주먹을 움켜쥐고 나지막이 그러나 강하게 외쳤다.
“우리 성공해야지.”
그리고 누군가가 다들 들으라는 듯이 충성스럽게 말했을 것이다.
“조국에 보답하려면 뼈가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공부해야 해.” 
그런 말을 김병로가 하지는 않았으리라.
4.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배치된 곳은 대학이 아니라 임시 숙소였다.
소련도 이차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므로 폐허를 다 정리하지 못했지만 모스크바 시가지는 육이오 동란을 겪은 평양보다는 나았다.
총탄 자국이 남아 있는 임시 숙소는 천정이 높은 4층 건물이었다. 
천정이 높으니 계단도 높았다. 
낡고 우중충한 건물이었지만 동양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그들의 최종 행선지는 동독이었다. 
북한의 젊은이들을 뽑아서 동독에 보내어 교육시키는 것이니 소련은 중간에서 매개체 또는 전달자였다. 
인력은 북한이 공급하고 교육은 동독이 담당한다는 측면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종주국의 행세를 톡톡히 하고 있었다.
라이프치히. 동유럽의 중심지. 
김병로의 일행은 라이프치히에 배치되었다.
라이프치히 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한때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음악과 인쇄술이 번성하였던 도시였다. 
동독 시절에는 비중이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다.
독일 통일의 과정에서 유명한 일화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열린 월요집회였다.
당시 숙소는 거의 수용소 수준이었다. 
한 방에 4명씩 거주하였다.
창문은 높았다. 
까치발을 하고 내다보는 창밖의 경치는 을씨년스러웠다. 
다른 건물의 지붕들이 건너다 보였다. 
하늘은 한 줌 정도 굴뚝들 틈으로 걸쳐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열심히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공부만이 그들을 현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향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나먼 독일의 땅은 흙마저도 낯설었다. 
축축하고 굵고 검은 색이었다. 
고향의 흙처럼 부드럽고 가볍고 밝은 갈색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공을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고 독일어를 배워나갔다. 
1년이 지나자 그들은 곧 러시아어보다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독일어 공부를 마치고 동독의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취득한 그들은 동독 각지의 대학으로 입학하였다. 
김병로는 드레스덴으로 갔다.  
드레스덴은 이차대전 당시 엄청난 폭격을 받았던 도시다.
작센 왕국의 수도인 적도 있었으니 화려한 궁전과 예술적인 건물들로 도시는 사치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별명이 엘베 강의 피렌체였다.
군수 공장은 아니었지만 공장들도 많았던 탓에 이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군은 무차별적으로 공중 폭격을 가하여 민간인도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물론 도시도 남아나지 않았다. 
드레스덴 대학은 1800년대 초에 설립된 대학으로써 명성이 강했다.
대학 건물들은 도시의 남쪽에 모여 있어서 어느 정도 캠퍼스의 개념을 갖추고 있다. 
김병로가 편입할 때에는 Königlich-Sächsisches Polytechnikum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1961년부터 Technische Universität Dresde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김병로는 대학의 이름이 바뀌기 직전까지 드레스덴 대학 전기공학과에서 1960년까지 육년을 지냈다. 
석사시험까지 치렀으니 곧 석사학위를 받을 예정이었다. 
5. 김병로는 드레스덴에 있을 때 몸이 아픈 적이 있었다.
하르츠(Harz) 지방으로 치료차 요양을 갔다.
지금은 독일의 중앙이지만 독일이 분단되었을 때에는 하르츠 지방을 관통하여 동독과 서독의 경계선이 지나고 있었다. 
그때 김병로는 서독과의 경계선을 눈여겨 두었다고 한다.
김병로의 탈출 루트가 하르츠였다. 
독일의 숲이 모두 유명한데 하르츠 지방도 숲이 유명하다. 
독일 남쪽 국경의 알프스를 제외하고 독일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다.  
전나무 숲이나 가문비나무 숲은 깊어서 한낮에도 컴컴하고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에 나오는 마녀들이 살고 있음직하게 아주 울창하였다.  
요즘 도시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전통적으로 독일 사람들은 그런 숲길을 하루에 한두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씩 산보하는 것이 생활의 습관이다.
그런 산보를 반더룽(Wanderung)이라 한다.
김병로도 하르츠에서 산보를 다니면서 길을 익혔다.
당시에 동독은 이동에 제약이 엄격하였던 것은 아니었고, 베를린 장벽도 없던 때였다.
동서독 국경은 처음에는 국경이라기보다 건너서는 안 되는 경계선 정도였는데, 차츰 장애물도 세우고 도랑을 파서 차가 다니지 못하게도 하고 나무들도 뽑아 시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서독 전 국경에 통행금지 시설을 설치한 것은 1962년이었다. 
하르츠 같은 깊은 산중은 김병로가 탈출할 때에는 지키는 초소병도 없었고 시설을 설치하기도 어려웠다.
베를린 장벽은 1961년부터 건설되었으니 김병로가 탈출하기 직전이었다. 
베를린 장벽의 건설과 함께 동서독 사이의 장벽은 점차 견고해졌다.
서독 사람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이 경악하였지만 동독에서는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김병로 등도 서독과의 차단을 실감하게 되었다. 
독일의 여러 곳에 견학도 다녔으므로 어느 정도 감각은 있었다. 
김병로와 함께 북한에서 온 학생들 중에서 몇몇은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뜻을 모은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기회를 찾아 실행에 옮겼다.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은 동독의 초소병에게 총을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을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탈출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이 탈출하자 동독에 그냥 남아 있던 동료들이 피해를 입었다. 
나머지 북한 출신 학생들은 모두 중도에 북한으로 돌아갔다. 
자발적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귀국 명령이 떨어져서 마지못해 돌아간 것이다.
아마 감시하는 사람들이 곁에 붙어서 신의주까지 동행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김병로 등이 야속하였다. 
조국을 버리고 도망한 사람들은 김병로 등이었는데, 도리어 자기들이 애꿎게 의심을 받게 되어 죄인처럼 송환되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떠날 때에는 함께 공부하여 성공하자고 서로 부둥켜안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냉전의 세계는 이들의 순진한 맹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서로 등을 돌리면서 가는 길이 엇갈렸다. 
전해 듣기로는 이때 강제 송환된 사람들 중에는 평양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김일성 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세상을 떠났는지 모르지만 누군지 궁금하다.  
6. 1970년대 초부터 한국 정부는 해외의 한인과학자들을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또는 한인 유학생이 많은 대학은 대학 단위로 한인 학생회가 구성되어 상호 교류와 정보교환 및 단합의 장으로 이용하였다. 
미국의 경우는 육이오 동란 이후 유학생들이 많이 건너갔기 때문에 그 조직이 깊고 넓고 다양하였지만 독일은 상대적으로 한인과학자의 숫자가 작아서 이때야 조직화되었던 것이다. 
1973년 5월에 재독일과학기술자협의회(Verein Koreanischer Naturwissenschaftlicher und Ingenieure in der BRD e.V. 줄여서 VeKNI, 재독과협)가 결성되었다. 
재독과협에 이어 재불한국과학기술자협회(줄여서 재불과협)가 1976년, 재영한인과학기술자협회(줄여서 재영과협)가 1974년 11월 결성되고 이들을 아우르는 재구라파한국과학기술자연합회(줄여서 재구과련)가 1977년에 결성되었다. 
재독과협에 참여한 과학기술자들 중에는 주로 한국에서 유학 가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동독에서 넘어와 서독에서 공부하고 자리 잡은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김병로도 그 중의 하나였다.
김병로는 재독과협에 참여하여 꾸준히 활동하다가 1989년 1월 1일부터 약 2년간 제15대 회장을 맡았고 다시 1999년 1월 1일부터 2년간 제21대 회장을 맡아서 일을 하였다. 
재독과협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김병로는 재구과연 의장도 겸임하였다. 
김병로가 재독과협 회장으로써 재구과연 의장을 맡았을 때 재불과협의 회장은 민선식 박사였다. 
그 즈음의 일이었다고 하는데, 대한민국 정부에서 재구과연에게 사무실을 하나 장만해 주기로 하였다. 
즉, 재구과연이 사용하도록 조그만 건물을 구입하기로 하였는데, 뜻은 좋았다. 
돈도 얼마 들지 않으면서 어엿한 사무실을 가지게 되므로 재외과학기술자들의 자부심도 생기고 나라의 위상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독일이나 영국이나 프랑스의 건물을 매입할 수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느 나라에서 구입하는 것이 세금 등을 가장 적게 내는가, 누가 관리할 것인가, 3개 과협이 순환하면서 재구과연의 의장을 맡는데 과연 기대하는 바 목적에 부응할 수 있는가 등등이 난제였던 모양이다. 
어떻든 오늘날 재구과연의 모습을 보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해외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1970년대였다. 
1974년도부터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종합 학술대회가 열렸다. 
초기에는 주로 재미과학기술자들을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곧, 재독과협 등이 조직되면서 유럽의 과학기술자들도 초청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어려운 시기에 해외 유학을 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이해가 부족하였다고 판단한 주최측은 이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학술대회에 이어 산업시찰도 시켰다. 
1990년의 뉴스를 보면 
“한국 과학기술 단체 총연합회는 미주와 유럽, 소련, 중국 등 세계 여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고급 과학기술자 600여 명과 국내 과학기술자 등 모두 4,000명을 초청해 ‘1990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종합학술대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과학기술자의 교류와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한 이번 대회의 참가자들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동력자원 연구소와 구미공업단지의 여러 산업 시설들을 돌아봤습니다. 1974년 이래 공산권 교포가 참가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라는 기사가 있다. 
지금도 3년마다 한 번씩 개최한다.
다만 지금은 몇 백 명 수준이라니 70년대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김병로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77년이었는데 이 대회를 통해서 한국을 방문한 것이었다.
김병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또한 김일성의 지시를 무시하고 서독으로 탈출하였으므로 북한에서 보면 배반자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만 해도 김병로는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어떻든 정치적인 시각에서 보면 매우 민감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왜냐하면 평양 출신이라는 점이 대단히 심각한 제약이었고, 또한 당시로부터 약 10년 전인 1967년 동베를린 간첩사건이 터져서 독일의 한인 사회가 바짝 긴장하였기 때문이었다. 
7. 김병로처럼 탈출한 사람들은 서독 정부가 학교를 주선해 주었다.
몇몇은 오스트리아로 갔다.
나머지는 독일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미국이나 영국으로 건너간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동독에서 6년을 지내면서 독일어권이 익숙하였으리라.
김병로는 뮌헨으로 갔다. 
뮌헨대학 (Ludwig-Maximilians-Universität München, LMUM)에 들어갔다. 
거리로는 드레스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왜 뮌헨이었는가.
김병로는 평양을 출발할 때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있었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발전에 대하여도 관심이 깊었다.
동독으로 가게 되었다고 정해졌을 때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뮌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서독으로 넘어온 후에 정착지를 선택할 때 뮌헨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슈뢰딩거도 그때 살아 있지 않았습니까?”
“아니야. 우리가 넘어오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어.” 
“그랬나요?”
슈뢰딩거는 1961년 1월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직전까지 비엔나 대학의 석좌교수였다. 
“슈뢰딩거가 살아있었으면 교수님도 독일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로 가셨을 수도 있었겠네요.”
“아냐. 그렇지는 않아. 슈뢰딩거는 나이가 많아서 학생을 받지 않았거든.”
“나이는 하이젠베르크도 역시 많지 않았습니까?”
“나이는 하이젠베르크가 열네 살 어렸지. 그 당시 아직 예순 하나였어.”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솔직히 김병로 교수님이 부러웠다.
왜냐하면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대가의 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영광 아닌가.
더구나 동독에서 탈출한 북한 출신의 조그마한 체구의 학생이라니.
그런데 이때 이미 하이젠베르크는 플라즈마나 핵융합 쪽에 관심이 있었고, 김병로에게는 학문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만 인간적인 면에서 두 사람은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두 사람 모두 학문을 위하여 외부의 강제적인 상황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유대인과의 관계, 나치와의 관계, 전후 미국과의 관계 등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학문의 추구와 관계없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어떻든 사실이다.  
김병로도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가족과 자기의 조국을 등지고 서방으로 건너왔다. 
오늘날처럼 자기가 공부하고 싶은 곳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면에서 어쩌면 하이젠베르크는 동질감을 느끼고 김병로를 학생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른다.
마지막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1961년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966년에 마이스터, 즉,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1966년부터 뮌헨 대학에서 조교 및 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막스플랑크 연구소 (Max-Planck-Institut fur Physick und Astrophysik in Munchen) 소속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로부터 약 1년 반 정도 MPI의 연구원으로 있다가 1971년 아헨으로 옮겼다. 
김병로는 하이젠베르크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다. 
예를 들면, 하이젠베르크를 내세워 자기자랑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는 김병로의 겸손한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호가호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짓궂게 추측하자면 박대 받거나 박대는 아니라도 거의 무시당하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지위가 달랐다.
한 사람은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상 수상자였고 또 한 사람은 거의 목숨을 걸고 서독에 정착하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야 하는 보잘것없는 망명자였다. 
하이젠베르크로써는 아시아의 끝에 있는 공산주의국가에서 동독으로 왔다가 넘어온 김병로를 연민의 정으로 그냥 데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
이런 생각을 하면 결국 하이젠베르크에 대하여도 김병로에 대하여도 어두운 면을 상상하게 되므로 그만하자.  
 
8. 김병로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78년이었다.
그해, 이휘소 박사를 기념하여 한국물리학회가 주최하고 입자물리학 분야의 여러분들이 주관하여 국제 심포지엄이 서울대에서 열렸다. 
이때 국외의 한인 물리학자들도 많이 참가하였다.
앞서 말했지만 김병로는 1977년에 한국에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종합 학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처음 남한에 왔다. 
그때, 정부에서는 국내외의 과학기술자들을 연결하여 공동연구를 추진하게 하여 선진국의 연구 성과를 국내에 확산시키고 과학기술의 저변확대 및 고도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재외과학기술자들을 분야별로 분류하여 국내의 과학기술자들에게 인적 정보를 제공하고 국제공동연구를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김병로는 과학기술원 물리학과 교수였던 조병하 교수님(이하 존칭 생략)과 연결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1978년에도 한국에 온 것이었다. 
1978년이라면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옮긴 지 4년째라 어수선하였지만 이휘소 국제 심포지엄에는 압두스 살람을 비롯하여 쟁쟁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었다. 
김병로와 조병하는 그 후 몇 년간 국제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조병하와의 관계로 한국과학기술원에서는 여름학기에 초대칭성에 대하여 강의하기도 하였다. 
어떻든 김병로와 조병하가 연결되는 바람에 나도 김병로와 연결되었지만, 지금 회고컨대, 솔직히 말해서, 이 두 분은 당시 한국 입자물리학계에서는 주류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다.
당시 한국의 과학기술계의 전반적 인적 구성을 보면 미국에 유학한 후 돌아와 자리 잡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미국 어느 대학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면 대개는 누가 언제 어떤 지도교수와 어떻게 공부하였는지 서로 알 수 있었다.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완전히 마이너리티였다. 
그런데, 김병로나 조병하는 둘 다 미국과 인연이 없었다. 
김병로는 독일에서 학위를 취득한 후 아헨에 있었고, 조병하는 경북대에서 학위를 취득하였다. 
더구나 김병로는 출신도 출신이었다. 
또, 조병하는 갓 만들어진 한국과학기술원 소속이었고 김병로는 아헨공대였다. 
“아헨이 어디야? Technische Hochschule? 기술고등학교인가?”
거의 이런 반응들이었던 것이다.  
9. 김병로는 조용하고 깨끗하게 살았다.
법을 준수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은 서독으로 넘어온 후의 생활방식이었다. 
남의 주목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정치적 견해는 전혀 피력하지 않았다.
가령, 정치인의 부정행위 등이 발각되어 매스컴에서 크게 보도하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한 마디씩 비난하는 것은 독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데, 김병로는 전혀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억지로 의견을 말해야 한다면 기껏해야
“그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런 정도였다. 
이것은 김병로의 성격 탓이기도 하고 또 살기 위하여 몸으로 익힌 방편이기도 하였다고 생각된다. 
공연히 분란을 일으킨다든지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질시와 경계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과의 관계는 몸을 많이 사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편 가르기를 하든지 또는 어떤 주동자가 모임을 결성하든지 하면 결코 끼어들지 않았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 김병로의 모토였다고 말할 수 있다. 
70년대에는 재외의 교민들도 친정부와 반정부로 나뉘어 대립하는 일이 잦았는데, 김병로는 그런 데에 전혀 휩쓸리지 않았다.
출신 성분 때문에 남쪽에서도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더욱 조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병로는 겉모습만 한국인이었다. 
주중에는 학교에서 연구하고 주말에는 산보를 다니면서 일반적인 평균 독일인이 되었다. 
김병로에게 있어서 한국은 남이든 북이든 멀리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한 기피증은 1973년에 재독과협에 가입하고 1977년에 한국을 방문하고 나서야 겨우 극복하였다고 생각된다.
10. 한국에 대하여 마음을 연 것은 아마도 사모님이었던 김서영 여사(이하 존칭 생략)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김서영은 남한에서 손꼽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똑똑하였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다녔다. 
대학에서는 기악을 전공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으로 유학을 떠났다. 
뮌헨이라면 음악적 전통도 강한 곳이지만 전혜린 때문에 유명하였다. 
김서영은 전혜린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서른도 되기 전에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한 독일유학생이었다.  
이화여대에도 강의를 나오던 전혜린이었다.
전혜린은 김서영에게도 하나의 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독일 뮌헨을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김서영이 뮌헨 공항에 내렸는데 한국 청년들이 공항까지 환영을 나왔다.
당시는 보딩 브리지가 없이 타막에 그냥 내렸다고 한다. 
환송 환영도 지금처럼 통제되지 않았다.
“어떻게 알고 나왔는지 몰라.”
김서영은 당시를 회고하며 밝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여전히 쨍쨍했다.  
“하여튼 총각들이 다들 나와 있더라구.”
그 중에 김병로는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인연이었는지 만나게 되었다.
김병로는 북한에서 동독을 거쳐 서독으로 망명 온 처지라 고아나 다름없어서 뮌헨에 정착하고 있던 한국교민으로부터 여러 모로 도움을 받았다.
그 사람이 중간에서 다리를 놓아 두 사람을 소개하였다. 
그때부터 사귄 후 나중에 결혼하게 되었는데, 김서영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김서영의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될 정도다. 
결혼 상대가 난데없이 이북 출신이라니 난리가 난 것이 당연하였다. 
부족할 것 없는 집안에 공부 잘 시켜서 유학까지 보냈는데 기가 막힌 노릇이다. 
멀쩡한 남자들을 대 팽개치고, 근본도 알 수 없는 김병로가 가당한 말인가. 
그런데 김서영의 성격도 대단하여, 한번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고 한번 그런 것은 끝까지 그렇다고 우기는 성격이었다.
목소리도 짱짱하여 보통의 남자는 김서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기가 셌다.
반면에 김병로는 조용하였다. 
두 사람의 성격은 그야말로 양극이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김병로가 어떻게 김서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수수께끼다.
추측하건대, 조리 있고 차분한 말에 논리가 분명하고 또한 대범하며 또한 남의 험담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 성격 등 내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김서영이 마음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뮌헨에서 1967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을 시작하였다. 
“처음에 보니까 얼굴도 까맣고 키도 작고. 하하.”
김서영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마구 웃었다.
“그런데 어떻게 결혼하셨습니까.”
“나도 몰라. 그때는 눈에 뭐가 씌웠는지. 하하.”
이런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김병로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김서영과 결혼하고 나서 김병로는 남한에 대한 경계를 조금씩 풀었다. 
그래도 결혼 후에 남한을 방문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그 뒤로는 자주 한국을 방문하였다. 
또한 발을 넓혀서 다른 대학교에서 강연도 하고 세미나라든지 워크숍 등에도 참가하였다. 
당시 조병하의 제자들 중에서 같은 분야를 공부하고 있었던 소동섭, 이상훈, 그리고 나도 연구조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건국대 학생이었던 함승우와 이동원도 1990년대에 초대칭성을 공부하였다.
함승우와 이동원은 아헨에 정기적으로 장기 체류하면서 김병로와 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한국에서 지낼 때에는 처가 집에서 지냈다.
장인 장모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세계 한민족 과학기술자 대회에 참가하였으니 그냥 받아들였을 것이다. 
처가 집은 안양의 목감천 부근의 물왕저수지 남쪽에 있었다. 
거의 별장처럼 넓은 정원과 주변 풍경이 일품이었다.
김서영의 부모님이 그 집에서 부리는 사람 두엇을 데리고 살았다.  
안양의 번잡한 거리에서 벗어나 산 속에 자리 잡아서 그 집 앞으로는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았다. 
나도 한번 초대 받아서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또 그 집에서는 서울보다 한양대 안산캠퍼스와 가까워서 김병로는 홍주유와 같이 일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집 앞으로 큰 길이 뚫렸고, 김서영의 부모님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집주인이 바뀌었다.
11. 박사 학위를 받은 김병로는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내가 언젠가
“어떻게 아헨으로 오셨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김병로는 말했다.
“될 수 있으면 뮌헨에서 제일 먼 데로 자리를 옮기고 싶었던 것이지.”
이 대답은 농담이고, 아헨공대에서 자리가 났기 때문이다.  
1971년에 아헨공대 제3물리연구소의 소장이자 당시 총장이었던 헬무트 파이스너(Helmut Faissner)의 발탁으로 아헨으로 오게 되었다. 
아헨을 택한 또 다른 이유를 굳이 말한다면 아헨은 뮌헨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도시기 때문이다.
아헨은 북 라인-웨스트팔리아(Nordrhein-Westfalen) 주에 속한 도시다. 
뮌헨은 바바리아의 주도(州都)다.
그리고 바바리아 사람들의 지역 사랑이 심하고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지역 사랑이 심하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지방색이 강하다는 뜻이다.
바바리아 주가 보수적이라면 북 라인-웨스트팔리아 주는 리버럴하다.
바바리아에서는 보수적인 기민당(CDU)이 장기 집권하였는데 북 라인-웨스트팔리아에서는 주로 사민당(SPD)이 집권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개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외국인이나 비주류가 억압감을 덜 가지고 생활할 수 있다. 
특히 아헨은 국경도시로써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독일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아헨의 변두리를 산보하다보면 벨기에 땅을 지나기도 하고 네덜란드 땅을 지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중심이었던 루르공업지역을 품고 있으므로 주변국의 인력이 많이 모인다. 
네덜란드나 벨기에 사람들도 많이 들어와 직장을 가지고 독일 사람들도 두 나라에 건너가 쇼핑하기도 하면서 교류가 많다.
도시 전체가 밝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말투도 그렇다. 
나의 귀에는 말도 전형적인 독일어처럼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게 들렸다.
예를 들면 아헨에서 ‘r’ 발음은 우리나라의 ‘ㅎ’ 발음과 비슷하게 들린다. 
아헨공대의 정식명칭은 Rheinisch-Westfälische Technische Hochschule Aachen (RWTH Aachen)이다. 
루르 지방의 공업 발전을 위한 인력양성을 목적으로 1870년에 세워졌다.
이때를 전후하여 독일 곳곳에 세워진 대학들은 그 이전에 세워진 대학들, 예를 들면 역사 깊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이나 괴팅겐 대학 등과 구별하기 위하여 Technische Hochschule (TH)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TH를 놓고 기술고등학교냐고 묻는 것은 상식이 모자란 탓이다.
그래도 외부의 모르는 사람들의 오해가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 TH라는 이름이 좀 열등감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였는지 TH를 고쳐 대학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Technische Universität (TU)로 이름을 바꾸는 대학들이 생겼다.
예를 들면 베를린공대는 TU Berlin가 되었고 네덜란드의 델프트대학도 TU Delft가 되었다.
그러나 아헨공대는 TH를 끝내 바꾸지 않고 RWTH Aachen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영문명은 RWTH Aachen University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스위스의 유명한 대학인 취리히공대와 로잔공대도 각각 ETH Zurich 및 EPF Lausanne로써 TH를 유지하고 있다. 
아헨에서 김병로는 처음에는 Helmut Faissner와 일했고, Hans Reithler나 Rudolf Rodenberg와도 일했다.
모두 실험물리학자였다.
Faissner는 CERN에서 일하였으며 페차이-퀸의 액시온을 찾은 [결국 없다는 것을 밝힌] 실험으로 유명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한 Faissner는 1963년에 실험물리학석좌 (Lehrstuhl für Experimentalphysik)를 받고 아헨공대로 왔다.
1969년부터 2년간 아헨공대의 총장 (rector)였다.
김병로는 이때 아헨으로 올 수 있었다. 
Faissner는 늘
“Bjong!”
이라고 김병로를 불렀다.
Faissner의 연구소에 오게 된 김병로의 타이틀은 Wissenschaftlicher Mitarbeiter, 즉, 연구원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 
강의를 담당하고 학위논문을 지도할 수 있는 직위였다. 
아헨공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끝내 이 타이틀이었다.
나중에는 초대칭성 연구에 몰두하였다. 
김병로의 지도를 받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독일 학생들 중에 Christoph Stamm, Achim Stephan, Peter John, Marcus Weber, Holger Franz 등이 있다.  
12.아헨으로 온 뒤에 집을 구할 때 직장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데도 불구하고 발하임(Walheim)에 집을 구하였다. 
그곳은 직장 동료인 Rhein도 가까이 살았지만 아이펠(Eiffel) 옆이었다.  
아이펠은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에 걸쳐 있는 산지로 숲이 유명하다. 
아이펠에서부터는 대서양까지 그저 밋밋하게 낮아지면서 네덜란드 평지가 펼쳐진다. 
네덜란드에서 보면 그 곳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래서 이 지방 사람들은 아이펠을 “Dutch Alps”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이펠 한가운데 있는 몬샤우(Monschau)라는 작은 마을도 유명하지만 루르제(Rursee)라는 호수가 풍광이 좋아서 독일의 부자들이 별장을 많이 지어놓고 지낸다.
김병로는 하르츠에서 익힌 산보에 맛이 들어서 시간 있을 때마다 아이펠을 산보하고 다녔다.
나도 독일에서 있는 동안 김병로의 집을 방문하면 함께 산보를 나가곤 하였다. 
은퇴하고 나서는 집을 옮겼다. 
김병로는 아이펠 부근의 땅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바로 옆의 벨기에 땅이 싸서 벨기에 땅을 샀다. 
부드러운 언덕들이 넘실대듯이 이어지는 마을인데 만더펠트(Manderfeld)라는 곳이다.
발하임에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남서쪽으로 숲을 지나가면 나오는 벨기에 시골이다. 
계곡 쪽으로 비탈을 내려다보는 넓은 땅에 2층 집을 새로 지었다.
거실에서는 전망이 좋다. 
김병로는 연말이면 외국에 나가 있던 아들들 내외를 불렀다. 
지금 이 집에서 김서영이 혼자 살고 있다.
김병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김서영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부지런히 지낸다. 
우리나라로 치면 텃밭도 일구면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고 가끔 아헨에도 나가며 살고 있다.
아들이 둘인데 모두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
큰 아들 김명철 박사는 뮌헨에서 났다. 
대학 다닐 때부터 맥킨지에 인턴으로 일하더니 결국 금융전문가가 되어, 캘리포니아의 Invest Growth Capital이라고 하는 금융회사에서 Albert Kim이라는 이름으로 일하고 있다.
작은 아들 김명현 박사는 아헨에서 났다. 
분자유전학을 전공하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Donnely Centre에서 Philip Kim이라는 이름으로 일하고 있는데, 연전에 포항공대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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