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산학부] 故 유주현 박사님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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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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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공인수 (부경대학교)
우리나라 산업미생물 분야의 대가이셨던 愚齊 柳洲鉉 교수님의 업적과 일생의 걸어오신 길을  많은 제자들을 대표하여 제가(부경대학교 생물공학과 교수 공인수) 글로써 소개해 드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스승님의 발자취를 제자로서 되짚으며 교수님의 학문과 연구에 대한 이상과 철학을 서술해야 함과 동시에 교수님의 한 인간으로서 가지고 계셨던 가족, 종교를 통한 진솔한 삶을 표현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교수님을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은 40여 년 전인 1974년으로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중후함과는 달리 시골 아저씨 같은 구수하고 어눌한 말씨는 누구에게나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교수님과는 그 후 계속해서 학부와 석사, 박사과정에서 지도교수님으로서 저의 연구와 학업에 크게 영향을 미치셨고 부경대학교에 자리 잡은 후에도 학문의 후학으로서 연을 이어왔습니다. 교수님은 2011년 타계하시기전까지 무려 50년 이상, 미생물을 대상으로 연구하신 우리나라의 산업미생물 분야의 선도자 역할을 담당하신 한분이셨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던 때 부산에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셨고 그 후 동경대학교 농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시고 바로 1968년에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에 교수로 부임하셨습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모든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던 시기로 연구를 하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였지만 교수님은 주위의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특유의 부지런함과 열정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 내셨고 또한 미생물 발효 산업계에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하면서 핵산 조미료 개발의 성공 등에 중요한 숨은 역할을 하셨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산업적 응용에 관심을 크게 가지시게 된 것은 아마도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 과제인 치즈 제조용 응유효소의 순수 분리 및 결정화와 무관치 않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교수님의 연구 결과는 당시 세계적 관심을 받았으며 100년이 넘는 일본 농예화학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학회상을 수상하며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는 사건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평생을 학자로서 또는 연구자의 자세로 임하시면서 일생의 사업으로 삼은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미생물 보존 기관인 한국종균협회(현; 한국미생물 보존 센터)를 세계적인 미생물 보존 기관으로 성장 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보편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1970년대만 해도 미생물을 중요한 자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없었던 때, 미생물의 자원화를 예견하시고 1980년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있었던 한국종균협회를 식품공학과로 옮겨와 그때부터 갖은 애착을 가지고 발전시키는데 혼신의 힘과 노력을 바치셨습니다. 그 결과 연구용 미생물의 보존은 물론 특히 특허를 위한 미생물의 기탁기관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기관으로 발전시킨 것은 매우 중요하고 대단한 공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교수님은 또 다른 욕심이 학과의 세계화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교수님 지도아래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외국 대학 또는 연구기관에 가서 연구 경험을 가지게 하는 일에 의욕과 열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특히 1970년대에는 현재와는 달리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매우 열악한 시절이었고 자신의 부담으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있는 학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때입니다. 교수님은 해외에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모험심을 가지게 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셨습니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에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대학들을 개인적으로 알아보고 대학원의 많은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셨습니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서는 UNESCO를 통한 프로그램으로 단기연수로 일본의 동경대학에서 1년 이상 연구할 수 있는 길을 10년 넘게 지원해 주셨습니다. 그 걸과 연세대학교 대학원생들에게 선진 학문을 경험하고 돌아오는 기회를 제공하여 연구실의 질적 수준 향상이라는 효과를 얻게 하셨습니다. 필자를 비롯하여 연세대학교, 강원대학교, 부산대학교, 전주대학교 등의 여러 대학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식품연구원 등의 연구기관에서 재직하고 있는 많은 인재들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고, 현재 생명공학 관련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가정과 기독교 신앙>
교수님은 한신숙 여사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둔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셨습니다. 결혼은 1957년에 하셨고 일본 동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5년간의 결혼생활에서 두 분 사이에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유학을 갈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국교정상화가 되기 전 상황으로 비자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고 특히 남편과 같이 가족이 모두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때였습니다. 한 여사께서는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후의 생활은 시동생 셋과 시할머니와 함께 어려운 경제적 상황 하에서 외롭고 고달픈 삶이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유 교수님께서 유학을 떠난 지 2년 6개월이 지난 후 남편이 지도교수이신 K. Arima 교수께서 가족의 초청장을 보내 주셨는데 이 초청장은 지도교수께서 직접 일본 출입국관리소에 찾아가 승인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을 때 별 문제없이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한일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유학생의 가족이 입국비자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 일본의 신문이나 잡지에도 보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합류한 가족은 한 여사님의 아르바이트 수입과 교수님의 장학금을 합쳐 한 달에 30,000엔 정도로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여유 없는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한 달 생활비로는 고기를 맛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닭의 뼈와 껍질만을 싸게 구입하여 쌀을 씻은 물과 같이 끓여 먹는 것이 최고의 보양식이었고 그나마도 보름에 한 번 정도나 먹을 정도로 최저의 생활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막내딸을 낳아 세 딸의 딸부자가 되었는데 막상 출산 후에는 생활비가 걱정되어 지도교수를 찾아가 장학금액을 최저 10,000엔을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도교수께서는 요청을 한 금액의 3배인 30,000엔을 매달 주시기로 결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매우 감격스러워 하셨다고 합니다. 사실은 너무나 형편없는 살림에서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낙태를 생각하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말을 했더니 낙태를 하면 산모도 위험하며 병원비도 많이 든다는 말에 막내딸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이렇듯 있어서는 안 될 생각도 하신 적이 있었지만 막내딸의 출산으로 말미암아 예상치도 않은 금액의 장학금도 받을 수 있게 한 복된 딸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 감사하고 귀중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부단한 노력 끝에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고 앞길로 고민하고 있을 때 연세대학교에서 교수 제안이 들어왔는데 사실 가족들은 모두 Post-Doc으로 미국으로 가는 것으로 결심하고 있었던 참이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교수님은 연세대학교로 진로를 결정하였지만 가족들은 귀국을 미루고 미국으로 간다는 생각에 계속 일본에 남아 있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귀국 후 1년이 지난 1970년 4월 유 교수님께서는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기로 결정되어 상금과 상패를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상금은 부인의 통장이 없으면 상금을 수령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일본의 가족들은 미국행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고 합니다. 사모님께서는 서울시민회관에서 서울시장으로부터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면서 인터뷰한 내용 등이 신문과 잡지에 실린 것을 나중에 보고 그 제서야 남편이 세계적인 업적의 훌륭한 일을 하였다는 것을 실감했었고, 그저 무뚝뚝하기만 했던 남편으로부터 처음으로 내조를 잘 해준 덕분이라는 진심어린 한마디에 남편의 노고에 깊은 감사함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두 분의 행복한 가정생활을 더욱 굳게 해 준 것은 평소에 기독교를 통해 이웃에게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깊은 신앙심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이 믿는 바를 즉각 행동으로 보여주는 “생활 신앙인”으로 주위에서는 알려져 있습니다. 워낙 말이 없으시고 과묵하셨지만 남들이 사소하게 지나치는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시고 실행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자주 건물 주위에 있는 나무들을 손수 매만지고 잡초 등을 친히 뽑아주는 모습에서 순수하고 티 없는 서민의 모습을 보이셨으며 특히 교회나 학교에서 식사 후에 남기는 음식물 쓰레기의 폐해를 강조하시면서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음식물을 남기지 않도록 강조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늘 강조하셨던 환경보존가로서의 면모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말을 늘 품은 채 조그만 일에도 감사하는 삶의 추구를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유년시절>
 교수님은 1934년 1월 29일에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695번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교수님의 부모님이 고향에서 양조장을 경영하셨던 영향인지는 몰라도 교수님은 평생을 발효미생물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도 우연은 아닐 것이라 추측됩니다. 교수님이 다니셨던 초등학교는 전형적인 시골학교로써 자연을 벗 삼아 지낸 어린 시절이 몸에 밴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지켜본 교수님의 일상 모습에는 대학교수로서 세련됨보다는 수수한 시골 아저씨나 할아버지의 모습이셨던 것도 이런 고향의 시골 풍경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교수님께서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림에 심취하여 학교 밖 산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의 풍경이나 또는 제방 길에 나란히 서있는 벚꽃의 아름다운 풍경, 산기슭에 서있는 정자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을 즐겨 그리셨다고 생전에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도취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늦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졌고 그럴 때마다 부모님으로부터 걱정 어린 질책을 받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오늘날에 비해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찬성을 하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이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셨던 아버님으로부터 버드나무 회초리로 심하게 매를 맞았고 장성해서도 기억되리만큼 무서움에 좋아하던 그림 그리는 일에서는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님 몰래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학교나 도내의 그림 전시회가 있을 때에 한해서만 그림을 그려 입선 또는 우수작으로 뽑힌 적도 있었다고 하니 그림에는 소질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생전의 교수님이 시간적 여유가 되면 가장 하고 싶던 일도 어릴 적 계속하지 못한 그림 그리는 것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애착을 피력하셨던 적도 있습니다. 
 교수님을 처음 대면하는 사람들은 교수님의 무뚝뚝함과 과묵함에 무척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으로 기억되기 쉽지만 사실은 매우 다정다감하고 진심으로 교감이 가능한 분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마도 예술적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시키고자 하셨던 감성이 가슴에 그대로 남아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대면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본성을 본능적으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림을 손에서 놓고 부모님이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그때부터 공부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고 합니다. 여름방학 때 친구들이 찾아와 같이 놀기를 권할 때마다 교수님은 “자신은 친구들보다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남들이 놀 때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서 공부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나중에 동경대학에서 지도교수의 은사인 일본 농예과학 분야의 대가로 알려진 사카구찌 플라스크를 고안한 사카구찌 긴 이치로 교수에게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저는 머리가 나빠 열심히 하다 보니 좋은 결과를 얻었을 뿐이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는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은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을 일반화 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나쁘다는 것은 실제 사실이 아니고 아마도 어릴 적부터 열심히 해야 하는 일들이 닥칠 때마다  필요에 따라 자신을 채찍질하고 각오를 더욱 다지기 위한 수련의 도구로 이용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교수님의 이런 모습은 일생을 통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데 절친한 사이로 알려진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의 양한철 교수님께서는 항상 우리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너희 지도교수 유주현 교수님은 불도저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하셨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느끼시기를 열정적이고 저돌적이며 도전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에는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로 진학하여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대학과 직장생활>
 교수님께서 대학교에 입학하신 것은 한국전쟁의 와중인 1952년으로 부산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피난을 갔던 때였습니다. 부산 영도 해변의 한쪽 모퉁이에 판자와 천막으로 세워진 교실에서 연세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루고 합격한 45명의 학우들과 등받이가 없는 긴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책상도 없이 노트에만 의존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휴전이 되어 서울로 환도하게 되었고 이공대학 전체가 신촌 캠퍼스에 있는 아펜제라관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책상이 붙어 있는 의자에서 강의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의 공업화학과에는 나중에 연세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셨던 홍윤명 교수님이 학과장이셨고 김학수, 윤흥기 교수님을 포함하여 모두 3분이 교수님으로 재직하고 계셨습니다. 그 당시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을 치룬 후의 비참하고 빈곤한 생활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기간산업의 부흥과 경제발전을 생각하면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여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공부를 했던 대학시절이었다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한국전쟁으로 교수님의 고향에서도 부모님께서 경영하던 양조장 건물이 모두 불 타고 작은 창고만이 덜렁 남아 있던 상태에서 잿더미 속에서 찾아낸 5개의 커다란 독을 창고에 옮겨 놓고 “천일양조장”이라는 간판을 다시 달고 탁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재기를 위한 노력들을 쏟아 붓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생 시절 방학만 되면 고향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를 도와 새벽부터 쌀가마니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부터 탁주 발효용 입국을 만드는 일, 술을 담그는 일, 발효가 끝난 술덧을 여과하는 일, 소주로 증류 시키는 일, 장부를 정리하는 일 등 고된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교수님은 그 당시에는 종국이 미생물을 배양한 것인 줄도 잘 모르는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는 학생답게 공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술이 미생물에 의한 발효 산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단지 집에서 예전부터 하던 방식대로 술을 만들고 술을 판매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미래에 발효공학을 정통으로 전공하여 미생물들의 발효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해 아마도 사람에게는 알지 못하는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해 보기도 하였다고 회상하시곤 하셨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후에 국무총리실 식품공업분야의 평가교수로 위촉되어 전국의 탁주와 약주를 생산하는 업체를 둘러보면서 술 제조 시 사용되는 곡자의 원료인 밀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주세법 개정의 필요성을  건의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국가에서는 건의를 받아들여 주세법을 개정함으로써 식량자원이 부족했던 당시 주요한 식량의 하나인 밀이 양조장에서 적게 사용케 유도하였고 이로 인한 막대한 양의 밀을 절약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합니다.
 1956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마땅히 갈 적당한 회사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당시 우리나라는 변변한 회사가 없었던 때 먼 친척분이 경영하시던 한국발효연구소에 들어가 사회의 첫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직장이야말로 교수님이 발효 미생물 연구자의 길로 갈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장소였습니다. 한국발효연구소는 술과 장류에 사용되는 미생물의 종국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회사로써 아버지의 양조장에서 사용하는 종국이라는 미생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런 미생물들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지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직장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공업화학과에서는 미생물에 의한 발효공학에 관한 지식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미생물에 대한 상식조차도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직장에서 미생물을 분리하고 다루고 배양하는 일들이 생소하였으나 흥미를 많이 느꼈던 시간들이었다고 합니다. 종국을 배양하는 기술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의 기술자들만이 다루는 기술이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비법처럼 인식하게 하여 아무에게나 전수하지 않던 고차원의 기술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다행히 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셨던 소장님으로부터 특별히 종국을 만드는 기술을 개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한천배지를 만드는 방법, 페트리디쉬에 접종하여 2차 배양하는 방법, 배양된 종균을 좁쌀에 배양하여 건조시켜 종국을 만드는 공정 등을 차근히 익히면서 미생물이 가지는 독특한 능력들을 실감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한천배지, 사면배지, 국 곰팡이, 배양기 살균 등의 용어들이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금방 이해할 수가 있었고 Aspergillus kawachii, Aspergillus awamori, Aspergillus usami Aspergillus oryzae등의 곰팡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였고 이들 각각의 곰팡이들은 서로 다른 제품에 달리 사용되고 있음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 상업용 종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커다란 방에 나무틀로 만들어진 배양상자에 살균된 곡류를 일정하게 나누어 담은 후에 곰팡이를 접종하여 배양을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온도의 조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온도조절 자동장치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당시라 오직 사람의 힘으로 24시간 주야로 일정한 온도를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밤낮 과 계절의 구별이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만약에라도 오염이 되거나 잘 자라지 못하면 폐기되어 회사에 커다란 손해를 끼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회사에서의 근무는 매우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익숙해지면서 습관이 되었고 이런 습관이 몸에 배인 탓으로 그 후 동경대학 유학시절 또는 연세대학교 교수 시절에도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필자가 대학원생으로 있을 때에도 새벽 4시면 학교로 오시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때 연구실에 학생들이 없을 경우에는 그날은 모든 연구실 학생들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지는 날이었으므로 아예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구실에서 1년 내내  먹고 자는 생활을 하는 것이 편해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머리를 굴리고 요령 있게 공부하는 학생들보다도 묵묵히 열심히 주어진 과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을 더 좋아하신 것도 알고 보면 젊은 시절부터 교수님의 몸에 밴 습관과 성격으로 인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경대학 유학생활>
 한국발효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에 뜻하지 않았던 동경대학으로의 유학이라는 커다란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1961년도에 연구소의 상사이신 이두영 소장께서 일본에 출장을 다녀오신 후 갑자기 찾으셨습니다.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까지는 조미료로 사용되는 글루탐산을 산분해법으로 생산하였었으나 일본에서는 이런 방법과는 다르게 발효에 의해서 생산하는 산업화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성공시켰을 정도로 미생물 발효 수준이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으니 자네가 우리나라나 회사를 위해서 발효학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목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주는 것은 어떻겠나?”하면서 의견을 물어 오셨다고 합니다. 특히 출장에서 동경대학 발효학 연구실의 교수를 직접 만나 이야기 끝에 한국에서 추천만 해주면 유학생 한명을 받아 공부시킬 수 있다는 허락을 이미 받은 상태에서 유 교수님을 마음속으로 추천하기로 정한 후에 말을 꺼낸 것이었습니다. 평소에도 대학교에서 미생물에 대한 체계적 공부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터에 유학에 대한 제안에 욕심이 있으면서도 준비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제안을 받은 터라 머뭇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장님께서는 같이 몇 년간 일하면서 유심히 지켜본 결과 유 교수님의 일하는 태도에서 동경대학에 가더라도 주어진 연구과제를 충분히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어 추천하는 것이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하는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학생들의 진로나 공부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요소의 하나가 지도교수의 결정인데 추천해 주신 동경대학 발효학 연구실의 교수는 K. Arima 교수로서 추후에 국제미생물연합회 회장까지도 역임한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일본을 대표하는 저명한 응용미생물 학자인 동시에 인격적으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유 교수님이 귀국 후에도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와 동경대학 농예화학과와의 학술교류, 한국종균협회 운영에 필요한 귀중한 미생물의 제공 또는 우리나라 발효 산업체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보의 제공 등 유 교수님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신 분으로 생전에 늘 지도교수이신 Arima 교수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일본에 가서 동경대학 석사과정에서 수행한 연구과제는 “미생물에 의한 비타민 A의 생산”이었습니다. 처음 연구다운 연구를 수행하면서 웃지 못 할 기억에 남는 아찔한 경험으로 한천 때문에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학생의 신분으로 미생물을 분리하기 위하여 한천을 사용한 고체배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가열하면 액체로 있다가 냉각하면 굳는 성질을 이용하여 가압살균한 배지를 Petri dish에 부었으나 다른 학생들 것같이 매끈하게 굳지 않고 울퉁불퉁하게 굳어 사용할 수가 없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되풀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일이 일어나자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눈에 띌까 염려가 되어 못쓰게 되어버린 한천배지를 모았다가 연구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밤에 혼자서 몰래 모아둔 한천배지를 증기로 가열하여 녹인 후 수도꼭지에서 더운 물을 내리면서 싱크대로 조금씩 부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고 말았는데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는데 전날 저녁에 한천배지를 버린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물방울로 똑똑 떨어지는 물이 싱크대에 가득차서 넘쳐흐르고 있었고 더욱이 아래층의 천정에서도 물이 떨어진다는 연락이 있어 연구실의 경험 많은 조교와 싱크대 밑을 열어보니 굳은 한천이 수도관을 막고 있어 일어난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한바탕 소동으로 창피하기도 해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곰곰이 따져보며 배지를 만드는 과정을 추적해 보니 사용된 한천의 농도가 사용하는 양의 10배인 15%를 사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트에 적은 숫자에 찍혀 있던 소수점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보지 않고 잘못 읽어 일어난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교수님의 연구 인생을 통하여 사소한 실수가 엄청난 실패를 낳게 할 수도 있음을 알게 해 준 교훈으로 이후에는 아무리 하찮은 것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준 좋은 경험이었다고 연구를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실수를 스스럼없이 말씀해 주시곤 하셨습니다. 아마도 학생들이 들으면서 무언가를 느끼게 하기 위한 목적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석사학위 논문을 위해서 비타민 A를 생산하는 균을 찾아내기 위하여 자연으로부터 수많은 미생물을 분리하여 탐색을 하였고 그 가운데 비타민 A를 생산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균을 선택하여 미생물을 배양하고 배양액에 비타민 A가 있는지를 크로마토그라피로써 정성적으로 분석한 끝에 비타민 A와 같은 위치에 spot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여 동정하였다고 합니다. 연구에서 성급한 결론을 쉽게 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귀중한 경험을 이 연구에서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선택한 균은 동정한 결과 Aspergillus awamori 라는 균으로 밝혀졌고 이것으로 이제 무사히 석사학위는 쉽게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분리, 정제 후에 정제된 순수물질이 비타민 A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기분석을 행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NMR, mass spectroscopy 등의 기계가 일본에서도 처음으로 제작되어 강습을 받아 가면서 구조를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하늘이 노래질 정도의 날 벼락같은 구조분석의 결과가 나왔는데 굳게 믿었던 비타민 A가 아니라 곰팡이의 색소로 밝혀졌습니다. 다행히 이 색소의 구조가 처음으로 밝혀지는 결과를 얻었고 Asperyellone라고 명명하여 학술지에 보고하였습니다. 비록 처음 의도했던 물질의 분리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연구실에서 어떤 물질의 구조를 분석하는 체계를 처음으로 확립한 점을 인정받아 논문이 심사를 통과하게 되었고 그토록 원하던 박사과정으로 무사히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사과정으로 진학 후 지도교수로부터 연구 과제를 놓고 토론을 가졌는데 유 박사님의 생각으로는 석사과정에서 수행했던 Asperyellone을 계속 연구하게 되면 쉽게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다른 과제를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 발효학을 비롯한 생물공학 분야의 연구는 항생물질과 같은 저분자 물질 또는 효소와 같은 분자량이 큰 고분자 물질에 대한 연구로 구분되었는데 둘 다 귀국하게 되면 중요하게 한국에서 이용될 수 있는 분야지만 석사과정 과정 중 저분자 물질 생산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기 때문에 박사학위과정 중에는 또 다른 분야의 하나인 효소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지도교수께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이때 지도교수께서는 이내 결심이라도 하신 듯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를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일본인 학생들에게 주어진 과제였으나 계속 실패를 거듭한 과제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안한 과제는 다름 아닌 유주현 교수님을 세계에서 유명한 미생물학자의 반열에 올려놓게 된 “치즈제조용 응유효소의 정제 및 결정화” 이었습니다. 치즈는 전통적으로 지방이 제거된 우유에 효소를 첨가하여 우유단백질을 고형화 시킨 식품소재로써 이때 사용되는 응유효소로는 어린 송아지의 제 4위에만 존재하는 효소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치즈제조용 효소를 얻기 위해 매년 전 세계적으로 약 4,000만 마리의 어린 송아지가 크기도 전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 학생들도 미생물로부터 치즈제조용 응유효소에 관한 연구를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에 유 교수님 자신도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잘못하면 학위를 늦게 받거나 또는 연구 중간에 다른 과제로 변경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염려도 앞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공만 할 수 있다면 한국인의 긍지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로 선뜻 과제를 택하였다고 합니다. 
연구가 시작된 후, 연구 중간에 효소를 정제 후 결정화를 시키는 과정에서는 여러 방법으로 시도하였음에도 성공하지 못하다 어느 날 효소 용액에 침전물이 생겨 현미경으로 관찰해 보니 뚜렷한 형상의 결정 모습이 보여 성공을 시켰다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지도교수께도 보여드렸더니 교수님께서도 맞는 것 같다며 늦은 저녁시간에 맥주파티를 열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효소활성을 측정해 보니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결정의 물리적 성질을 검토한 결과 결정화를 위해 사용한 무기염임이 확인되어 절망감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실망한 마음을 추스르고 실패를 분석하면서 재 시도를 반복하면서 대학시절 무기화학 강의에서 배웠던 이론을 바탕으로 효소액을 냉장고에 넣고 황산암모늄과 함께 수분을 자연 증발시키는 방법을 고안하여 시도한 결과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비이커에 백색 결정이 침전되어 나타남을 발견하였고 처음에 실패하였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신중하게 현미경 관찰과 효소활성을 등을 측정하여 마침내 효소결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지도교수의 축하와 칭찬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때의 환희는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종종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후 이 효소를 이용하여 치즈에 이용하는 산업화까지 이루고 나서야 연구의 학문적 성과는 인정받아 36세의 젊은 나이로 100년 넘는 전통을 가진 일본 농예화학회상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받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은사이신 K. Arima 교수도 또한 일본 발효협회상, 일본농예화학회 본상, 도레이 과학기술상, 일본 연구농업소상을 수상하셨고 해외에서는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생물공학분야의 Novo상을 얻은 해였습니다. 
필자가 동경대학 농예화학과에서 연수를 받을 때 유교수님이 수학하셨던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교수 연구실의 벽에 지난 100여 년 동안 자기들의 연구실에서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연구결과 3가지 사진을 걸어두었는데 가장 가운데 유 교수님의 효소결정화 사진이 걸린 것을 보고 가슴 뭉클함을 느낀 경험도 있었습니다. 연구를 거의 끝내고 귀국하기 전에 있었던 송년회자리에서 일본이 자랑하는 발효학의 대가이신 사카구치 긴이치로 교수님이 계셨는데 멀리 떨어져 앉아 있던 유 박사님을 불러 옆에 앉게 하신 후 술잔을 건네면서 ‘너는 수재라고 하더라’ 는 말에 흐뭇한 느낌을 가질 수는 있었으나 솔직히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더니 어려운 일을 성공시키면 그게 바로 수재라는 결론을 내주시어 좌불안석이 되었던 경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는 노력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유 교수님이 평생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주관하신 연구는 지금도 귀에 머물고 있습니다. ‘미생물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배반하지 않는다.’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 교수로서의 30년>
유 교수님은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1968년 지도교수와 상의하여 미국에 Post-Doc. 으로 가기로 결심하셨고 준비를 하던 중 연세대학교 시절 학부 은사님이셨던 당시 부총장이셨던 홍윤명 교수로부터 연세대학교에 식품공학과를 개설하니 교수로 부임하라는 연락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 교수님께서는 미국으로 가서 조금 더 연구를 경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심 때문에 몇 년 후에 부임하면 어떻겠냐는 연락을 하셨으나 홍 교수님으로부터 “이번 기회에 오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는 연세대학교에 올 생각을 말라” 는 단호하고도 짧은 회신에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식품공학과 교수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셨다고 합니다. 식품공학과의 첫 번째 교수로 부임하면서 1969년에 20명의 정원으로 학생을 모집하였고 학과의 전용 강의실과 연구실조차도 없는 열악한 환경으로 시작한 학과를 재임 30년이 지난 1999년에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수준으로 발전시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대학원생들의 연구는 박사과정이 1972년 3월, 석사과정을 1973년 3월에 개설되어 이때부터 식품공학과에서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생물공학 분야의 기초위에 전공을 쌓아 올리는 전인교육에 힘쓰고, 연구개발 능력의 향상과 학문연구의 국제화라는 목적에 입각해 불찰주야로 연구하는 분위기 조성에 공을 들여 연구 환경이 형성은 되었으나 연구내용의 질적 수준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느끼셨습니다. 연구실의 연구수준을 단기간에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신 끝에 일본의 동경대학에서 1년간 아시아 각국의 학생들에게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UNESCO program을 주관하는 동경대 교수에게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 대학원생을 받아 줄 것을 부탁해 1975년부터 10년간 매년 1명씩 동경대학에서 1년 이상씩 연구를 해보는 귀중한 기회를 대학원생들에게 제공하였습니다. 유 교수님께서는 학생을 선발해서 보낼 때 꼭 지켜야 할 조건으로 동경대학에서 1년간 연구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연세대학교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계속하겠다는 학생과 일본에서 연구한 결과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선발하여 보냈습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연수를 다녀온 학생의 대부분이 현재 대학교수나 연구소의 책임급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유 교수님이 선택하신 이 방법이 얼마나 학생들에게는 귀중한 경험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연구실의 연구능력과 질이 급격히 향상 되는 것을 느끼셨지만 교수로 부임당시 10년 내에 학문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연구 결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목표에 크게 못 미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빈약한 연구시설과 연구 환경, 턱없이 부족한 연구비와 대학원생들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교수님께서는 노력이 부족하고 공부가 부족하다면서 교수님 자신을 더욱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채찍질 하셨습니다. 교수가 되신지 거의 20여년이 지났을 때부터 외국에 논문을 실을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들이 미국에 Post-Doc으로 가는 경우가 많아졌고 아울러 미국에 계속 있으면서 미국의 대학교수로 재직하게 되는 연구실의 동문도 많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데에는 긴 시간과 물질적 투자가 계속 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장, 대학원장과 부총장>
교육과 연구를 통하여 대학원생 모집의 어려움, 빈약한 연구시설, 부족한 공간과 대학 당국의 제도가 대학의 세계화를 이루는데 비효율적인 점이 있어 이를 개선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공과대학장 경선에 나서 공과대학 발전을 위해 봉사할 결심을 하셨습니다. 다행히 많은 동료 교수들도 평소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 어렵지 않게 학장에 선출되셨습니다. 공대학장으로 재임 중 가장 역점을 둔 사업 중의 하나가 공간 부족을 해결할 새로운 공과대학의 신축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이를 위한 자금조달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여 당시 송자 총장님께 새로운 자금조달 방법을 제안하여 승인을 얻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자금조달방법은 서울시내에 위치하는 연구소를 필요로 하는 기업이 공대 건물 신축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고 대신 신축된 건물의 50%를 30년간 기업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안이었다고 합니다. 신축 공작관의 설계와 조감도도 예산을 줄이기 위해서 공대 송성진 교수에게 봉사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완성된 기본 설계도와 조감도를 가지고 여러 회사들과 접촉한 후에 최종적으로는 학과의 오두환 교수가 회사 창립초기부터 자문교수로 있는 풀무원 식품회사가 기꺼이 신축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그 후에 삼성그룹 등에서도 공과대학관 연구실에 입주하겠다는 데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공학관 신축에 절대적으로 힘을 보태셨고 유 교수님의 제1호 제자이셨던 오 두환 교수께서 젊은 나이에 타계하셨을 때 무척 슬퍼하시고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공대학장 부임 1년이 되는 시점에 송자 총장님으로부터 대학원장의 보직을 수락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셨을 때도 선뜻 받아들이시는 것을 꺼려하셨다고 합니다. 학장의 소임을 끝낸 후 다시 연구실로 돌아가시기를 진심으로 희망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총장님의 거듭되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 대학원장의 소임을 수락하셨습니다. 대학원장 재임 중에는 특히 대학원 학생들의 입학 정원을 충분히 채우기 위해 입학시험제도, 종합시험제도, 대학시험제도 등의 문제점들을 파악해 20여년이나 바뀌지 않던 대학원의 학칙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개혁을 한 후에 무사히 대학원장의 임기를 끝내셨습니다. 연세대학교의  대학원 입학정원제의 개혁방안은 계속 교육부에 건의되었고 전국 대학원장 회의에서도 주요 의제로 채택되어 교육부가 받아들여 시행하기로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합니다. 
 연세대학교에서 몸담은 지 25년이 지나고 정년퇴임이 5년 남은 때 대학원장 보직도 무사히 끝나고 평교수로서 연구실에 돌아와 연구에 전념하는 생활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생물 분리 샘플을 수집 겸 연구실 학생들과의 단합을 위해서 강원도 용평의 콘도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오대산 토양을 채집을 위해 하루 종일 산, 계곡 등을 찾아가 다양한 지형과 특색의 토양들을 모아서 분별하는 작업을 마치고 숙소를 돌아왔더니 대학원장이  신임 김병수 총장께서 부총장직을 받아달라는 내용으로 총장과의 통화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더 이상 보직을 수락하고 싶지 않아 총장과의 통화에서 거절하였으나 전화로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셔서 다음날 먼저 일행과 헤어져 학교에 나가 찾아보기 위해 총장께 전화를 했으나 통화하지 못하고 있던 중 오후 늦게 비서실로부터 ‘내일 오전 임명장 수여와 학. 처장 회의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아 참석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다 하느님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여 수락하셨다고 합니다. 
 부총장 시절에 가장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바로 한총련 사건이 일어나 종합관 건물이 불에 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장관 등에게  화재로 처참하게 잔해가 된 현장을 안내하면서 우리보다 먼저 과격한 학생운동이 있었던 동경대학을 생각하면서 정상화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그 결과 정부와 학교의 도움으로 1년 만에 새로운 종합관을 완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연세대학교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교수 승진제도를 엄격하게 강화하는 방안을 실행토록 하였고, 또한 외국대학 그 가운데에서도 일본 대학들과의 학술교류 협정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연세대학교는 외국대학과 학술교류 협약을 많이 하고 있으나 유독 일본의 경우에는 게이오대학 하고 만 교류를 하고 있었고 당시 일본의 국립대학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습니다.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관계로 동경대학, 교토대학, 오사카대학의 일본 3대 거점 국립대학과의 교류를 시도하였고 그 결과 3개 대학과 무사히 학술교류 협정을 맺을 수 있었고 교수들과 학생들이 학술교류, 연구교류 등을 할 수 있게 되어 부총장직을 수행하면서 보람을 느낀 일이었다고 합니다.
<국제기탁기관으로서의 한국종균협회와 산학협동>
 유 교수님은 연세대학교에 재직하시는 중에도 그리고 퇴임 후에도 미생물 보존기관인 “한국종균협회”와 산하기관인 한국미생물보전센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운영하셨습니다. 원래 사단법인인 한국종균협회는 미생물학, 응용미생물학 분야에 관련 학교, 국립연구소와 산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 연구자들이 우수한 미생물 균주를 수집해서 보관하고 필요로 하는 연구자들에게 분양해 주고, 우수한 균주를 개량하는 등의 사업목적을 두고 1967년 7월 21일에 창립총회를 열어 발족한 기관이었다.  발족당시 사무실을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국립공업연구소에 두고 회장으로는 오원선 국회의원, 이사장으로는 이 주식 교수가 선임되어 운영해 왔습니다. 1967년 12월 11일부로 과학기술처로부터 정식으로 사단법인으로 인가를 받아 경제적 지원을 받아왔으나 도중에 지원이 중단되어 운영이 어려워졌습니다. 1972년 당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협회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 교실의 유준 교수가 부회장 겸 이사장을 맡아 연세대학교로 옮겨 운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1978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이봉기 교수가 경제가 위축되고 정부당국에 의하여 종균협회가 학회통합정책으로 인하여 없어질 위기가 생김으로써 본연의 목적인 표준균주의 수집과 분양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유 교수님이 맡아서 발전시켜주기를 바란다는 의견과 부탁을 제시하였습니다. 교수님은 미생물을 사용하여 발효공업을 발전시키는데 꼭 필요한 국가사업임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표준균주를 보관하여 분양하는 곳이 없어 미생물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외국의 균주보관기관에 주문하여 사용하던 실정이라 시간과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에 운영이 매우 어려운 협회를 선뜻 떠안게 되었고 필생의 사업으로 타계하시기 전까지 이사장의 직함으로 협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1978년 6월 협회를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의 교수님 연구실로 이전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인수받은 협회 재산은 단지 캐비넷 하나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협회에서 분양할 균주가 턱없이 부족하고 빈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동경대학의 Arima 교수와 국제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균주 보존기관인 오사카 발효연구소(IFO)의 소장님을 만나 일본에서 보존중인 미생물들을 무상분양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셨습니다. 동경대학의 경우는 지도교수가 계신 관계로 아무런 제약 없이 연구실에 보존된 미생물을 언제라도 분양해 주시겠다는 허락을 받았으나, 오사카 발효연구소(IFO)의 경우는 이사회의 절차를 거쳐 통과되어야만 한다는 조건부의 양해를 얻어내고. 수주일 후에 발효연구소 소장으로부터 분양해주기로 결정했다는 통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사카 발효연구소의 경우 무상분양의 형태로는 불가능하며 표준균주를 서로 교환한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작성해서 날인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습니다. 사실은 한국종균협회가 교환할 균주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경대학의 지도교수를 비롯해서 일본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미생물 균주를 오사카 발효연구소에서 무상으로 분양받기 시작하면서 균주의 확보와 분양사업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할 때 이봉기 교수가 다시 찾아와 외국과 같이 한국종균협회가 특허신청 균주를 기탁 받아 보존하는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1979년 당시 우리나라는 특허청에서 가치가 있는 산업적 물질을 생산하는 미생물을 기탁하여 특허를 신청하게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특히 균주라는 자원을 확보하고 허위로 특허를 신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특허 미생물 기탁제도를 입법화할 필요성을 특허청장께 만나서 제안하였습니다. 국가 자산의 보호라는 필요성을 이해하고 특허청에서는 특허법 시행령 제 1조항에 “미생물을 이용한 발명에 대하여 특허출원을 하고자 하는 자는 특허청장이 지정하는 기관에 그 미생물을 기탁하고 그 기탁사실을 증명하는 서면을 출원서에 첨부하고 특허청이 지정하는 공공기관에 보관해야 한다” 고 규정하여 선진국에 비하여 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한국특허법상 처음으로 미생물 기탁을 특허 요건화 하였습니다. 특허균주 기탁제도가 입법화되면서 한국종균협회(KFCC)와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미생물자원센터(KCTC)가 1981년 8월 25일 정식으로 특허균주기탁기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가입한 나라는 국가에 관계없이 국제기탁기관으로 지정된 한곳에라도 기탁하면 특허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우리나라는 WIPO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임으로 외국인이 특허신청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KFCC나 KCTC에 미생물을 반드시 기탁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곧 우리나라도 WIPO에 가입하여 미생물 경우에 WIPO의 부다페스트조약에 의해 특허청에서는 미생물 국제기탁기관을 지정해야만 했고 특허청에서는 세심하게 심사하여 한국종균협회 부설 한국미생물보존센터(KCCM)와 한국생명연구원 미생물자원센터(KCTC)가 정식 지정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종균협회가 부족한 시설과 충분치 못한 보존 미생물의 수 등 아직도 넘어야 할 어려움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수준까지 올리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해 주신 교수님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주현 교수님께서는 학문의 울타리 안에서만 계신 것이 아니라 산학협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발효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와도 깊은 연계를 가지고 활동하셨습니다. 1969년 귀국 후 동경대학 유학시절 연구실을 찾아와 처음 알게 된 ㈜샘표의 박승재 사장님을 다시 만나 회사 연구소를 맡아 연구원들을 지도해 주고 공장에서 생산하는 장류의 생산 공정의 미흡함을 찾아 개선시켜 주시기를 요청받았습니다. 연세대학교 연구실의 빈약함으로 고심하던 차에 샘표 사장님의 제안은 당시로서는 연구비의 해결에 더없이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사실 장류 공장에서 발효에 사용되는 균의 제조법 등은 대학생 때 고향의 선친 양조장에서 다루는 방법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경험상으로도 공장의 발효 개선에는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균주를 배양하여 종국을 만드는 방법으로부터 동경대학의 연구경험에서 터득한 생산성이 높은 균의 선별, 잡균의 오염을 적게 하고 목적하는 균이 잘 생육하는 조건에서 입국을 만들고 발효하는 원리를 활용하는 원칙을 세워 현장 및 연구실의 직원들을 지도해 나가셨습니다. 또한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 환경에서 균을 일정하게 키워 제국하고 발효하기 위해서는 제국실, 발효실 등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한 장치가 없던 시절에 자동온도조절 장치가 갖추어진 시설들과 자동화공정의 도입할 것을 적극 조언하고 완성시켜 발효효율을 급상승시켜 회사의 생산성을 증대시키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학교와 정부로부터 시설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울 때 회사의 연구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고 연구비마저 도움을 받게 해주었던 ㈜샘표와는 그 후에도 계속 관계를 가졌고 지금과 같이 훌륭한 식품회사로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셨다는 것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나라 발효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생산품이라면 조미료에 쓰이는 핵산을 들 수가 있습니다. 유 교수님께서 우리나라의 조미료 핵산 발효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975년 당시 일본에서는 핵산을 발효법으로 생산하는 나라로 제일제당(현:CJ)에서 기술을 도입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일본 조미료 협회에서는 외국으로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어 허가할 수 없다는 이유와 핵산발효에는 고도의 발효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한국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일본의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기술을 개발할 테니 연구비에 개의치 말고 연구하여 반드시 성공시키라는 지시를 받아 제일제당과 함께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특히 회사 연구소 직원들과 유 교수님을 자극한 것이 일본이 한국은 성공할 수 없다고 깔보는 시각에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제일제당에서는 어떤 연유로 유 교수님을 연구의 책임을 맡게 해 주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동경대학 유학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고려대학교의 임병윤 교수가 친구였던 제일제당의 연구담당 전무께 추천해 주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개발은 생산균의 탐색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생산수율이 높은 균을 찾아내려는 1년 동안의 노력 끝에 핵산 생산균을 확보할 수 있었고 생산균을 확보한 후에는 핵산의 발효와 정제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여러 난관이 있었으나 마침내 핵산의 정제기술까지 확보하는 데에는 3년의 개발기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제일제당의 김포공장에서는 핵산 조미료의 원료인 이노신산과 구아노신산의 상업생산을 일본의 기술 도입이 없이 이루어내는 쾌거를 달성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지금 식품, 의약품 발효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제일제당과의 인연은 그 후 ㈜보령제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제일제당과 핵산 개발 당시 김포공장 공장장이었던 김홍집 전무가 보령제약으로 옮겨  의약품개발의 협조를 요청하였기에 기꺼이 김승호 회장님께 수락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이때의 인연은 계속되어 김승호 회장께서는 2012년까지 한국종균협회의 회장으로 계시면서 한국종균협회의 발전을 위해 큰 힘이 되어 주셨습니다. 보령제약과의 공동연구에서는 혈압강하제로 쓰이는 약품인 캐프토프릴(제품명:카프릴)의 합성을 독창적으로 개발하며 기존 합성에 의한 특허를 피해 국제 특허를 신청하였는데 미국의 제약회사로부터 이의 신청이 들어왔으나 과학적이고 회사의 적극적인 대처로 특허분쟁에서 승소하여 다국적 기업들과 특허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해결하는 본보기로 거론되는 대표적 사례의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이후 보령제약과는 우리나라에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개발당시 항암제 시장에서 판매고 수위를 달리고 있던 독소루비신이라는 항암제를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발효를 통해 생산하였습니다. 보령제약에서는 발효분야를 처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험이 없었으나 연구원들은 유 교수님의 지도하에 균주의 확보, 개량, 발효장치의 확립 등에 관한 기술을 차례로 확보하여 상업화에 성공시켰으며 이 같은 성공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독소루비신을 자체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암 투병 환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고 유 교수님께서는 자부심을 가지셨습니다. 
 유 교수님은 정년퇴임 후에도 전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서 현장지도를 하셨습니다. (주)코바이오텍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효기를 제작하고 이를 산업체, 연구소, 대학 등에 공급하여 발효공업 발전에 기여한 기업이었습니다. 코바이오텍과는 평소 연세대학교 연구실과 종균협회의 일로 자주 접할 수 있었고 특히 보령제약에서 독소루비신을 개발하여 현장 실습할 때 도움을 받았던 관계가 있던 회사였습니다. 당시 류대환 사장님이 찾아와 연구소를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받아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지도하면서 발효기 제조 이외에 회사가 사업화하고 자 하는 의약품 원료의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연구를 시작하여 항생제인 태이코프라닌의 개발에서 확립된 기술은 곧바로 생산을 위해 공장을 설립하여 상품화에 성공하였습니다. 이렇듯이 산업체의 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산업화를 하는 가운데 경험했던 수많은 실패 속에서 성공의 씨앗을 잉태시킬 수 있었고 연구원들의 책임감, 끝없는 성공을 향한 열정과 지식,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아이디어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발효산업에 이정표가 되었던 상품들이 나올 수 없었다고 굳게 믿으셨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셨던 유 교수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구절을 수없이 기도하면서 노력하고 지도하신 결과라고 생각하였으며 또다시 산학협동연구의 경험을 통하여 ‘미생물은 창의력을 발휘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다’ 라는 발효 미생물학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생전에 회상하셨습니다.
<학회활동 및 국가에 대한 봉사>
유 교수님께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기 한 해전에 한국에서는 200여명의 회원으로 한국식품과학회가 창설되었습니다. 교수님도 식품과학회의 회원으로서 학회의 발전에 아낌없이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특히 1985년에 언론에 보도된 산 분해 간장, 우지사용 라면, 마아가린 사건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산 분해 간장 사건은 교수님과 같은 관련이 있는 ㈜샘표의 간장 제품 등이 포함되었는데 콩을 분해하여 간장을 제조할 때 산을 사용하지만 제품이 만들어져 나올 땐 한 방울의 산이라도 포함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와 검사를 거쳐서 안전이 충분하게 확인된 상태에서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면으로 발표하여 산업체에 큰 타격을 일으킨 사건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거치면서 식품제조와 안전한 유통 등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여론을 조성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소비자단체, 언론기관 종사자들에게 이론적 지식을 제공하는데 학회의 활동이 적극적이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한국식품과학회의 임원으로서 세미나와 학술대회를 통하여 언론과 국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1986년과 1988년은 우리나라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게임을 개최하게 됨에 따라 세계에 우리나라의 식품산업이 외국인들에게 관심의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고 무역의 자유화가 시작됨에 따라 식품산업화의 선진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학회차원에서 마련한 분과위원회의 구성 등에 간사장, 부회장 등을 역임하시면서 홍보활동에 적극적이셨습니다.
 교수님은 1973년 10월에 창립된 산업미생물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자들의 대표적 학술단체인 한국산업미생물학회(현: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의 창립발기인의 한분으로서 학회창립의 주역이셨습니다. 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는 산업에 이용되는 미생물에 관한 기초지식에서부터 산업화에 이르는 폭넓은 학술 연구 결과와 정보를 공유하는 연구자들의 토론 장소를 제공하여 이를 바탕으로 미생물학, 유전공학 및 생물공학에 관한 이론과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보급하여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온 중요한 학회입니다. 교수님께서는 학회의 회장과 여러 임원 직책을 수행하시면서 학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교수님은 이외에도 한국미생물학회, 한국농화학회, 한국균학회, 한국생물공학회 등 국내의 관련 학회에 몸담고 계시면서 응용미생물의 연구 분야에 열정적으로 관여하셨습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미생물학회 (International Union of Microbiological Societies, ICEAM)의 한국대표로 활약하면서 세계 응용미생물 분야에 한국을 알리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학회의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셨던 반면에 교수님께서는 정책제안 및 입안자로서 국가의 과학기술발전에 전문가로서 힘을 보태셨습니다. 한국종균협회를 국제특허균주기탁기관으로 지정받는 과정에서 국내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던 특허미생물 기탁 시행령을 특허법에 첨가할 수 있도록 특허청장에게 정책제안을 한 것도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 초 선진각국에서 활발한 연구와 투자를 시작하여 정보산업과 함께 세계 경제를 견인해 가던 생명공학산업은 우리나라에서는 황무지와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처음으로 유전공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도래하면서 선진국에서는 의료, 식품, 농업, 환경에 이를 이용하고 동시에 예상되는 윤리적, 도덕적 그리고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등 다각적으로 분석하며 유전공학에 의한 산업 제품들을 창출해 내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전공학이 생명공학 산업계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막대할 것으로 예상하고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당시 이상희 국회의원이 “유전공학육성법” 즉 현재의 “생명공학육성법”을 국회에 제출하여 제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 교수님의 전문적 식견을 크게 참고하였습니다. 이때 필자는 대학원생으로 두 분이 연구실에서 라면을 드시면서 밤을 새워 토의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생생합니다. 지금도 이법이 토대가 되어 오늘날 우리나라의 생명공학산업이 크게 도약할 수 있는데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끝맺음>
충북 영동군 용산면 백자전리에서 양조장을 운영하셨던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셨던 교수님은 이웃에 있는 백화산의 웅장함을 닮아서인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던 분이셨습니다. 교수님께서 이루신 학문적인 업적은 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긍지를 알리는데 손색이 없었고 교육자로서 대한민국이 어려웠던 시기에 국가를 짊어지고 앞으로 끌고 갈 인재들을 길러내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21세기 한국이 자랑해야 할 첨단 생명공학 분야에 필요한 미생물 자원의 보존과 확보에 일찍이 눈을 돌리시어 국가 자원을 축적시키는데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사명감을 가지고 발전시켰습니다. 1970년대 국가에서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중화학공업과는 달리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효소, 항생제, 핵산 등 미생물 발효산업을 이끌어 국민 복리 증진에 공헌하셨습니다. 또한 생명공학 분야와 유전공학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시어 국가적 동력을 이끌어 낼 정책적 토대를 정립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교수님은 참 교육자의 길을 평생 걸어오셨습니다. 연구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는 게으름을 가장 경계하게 하셨는데 이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학교 출근은 새벽에 하시고 퇴근 후에 자정이 지난 시간에 자주 연구실에 들러 학생들의 연구태도에 경책을 가하시는 일은 일상화 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연구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몇 번이고 확신이 들 때까지 반복시키기로 유명하셨습니다. 많은 제자들은 교수님이 즐겨 쓰시는 ‘思則言 言則行 行則果’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이는 여러 말할 것 없이 확실한 실험 결과를 제시하면 믿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연구에 대한 집념 또한 대단하셨습니다. 동경 대학 유학 시, 박사 논문인 곰팡이로부터 응용효소에 관한 연구의 백미인 응유효소의 결정화 과정은 여러 일본 학생들이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한 난제의 하나였고 교수님 또한 실패를 거듭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향한 집념으로 결정화를 위해 수개월을 정제된 효소용액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매일 소량씩 염을 첨가하면서 냉장고 내에서 효소용액을 자연적으로 증발시킨 끝에 결정화를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용액이 냉장고의 낮은 온도에서 자연 증발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있는 지는 짐작할 수 있는 긴 시간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공시킨 집념은 연구결과의 성공에 앞서 인간 집념의 성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1년 간 응유효소의 제조를 위해 죽어가는 4,000 만두의 송아지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교수님의 제자 사랑은 남다르셨고 특히 교수님보다도 먼저 타계하신 제자인 연세대학교 오두환 교수의 영결식에서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오열하시는 모습에 많은 참석자들을 안타깝게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아들같이 교육시키면서 길러내신 첫 번째 제자이며 동료 교수로서도 연세대학교 공학 연구단지 건물 건축을 위해 풀무원으로부터 건축 자금을 출연시킨 장본인이셨기 때문입니다. 유 교수님은 제자들의 취업에는 발 벗고 나서시는 것으로 유명하신데 필자도 그런 혜택을 받은 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의 직장을 위해서 집념을 가지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절친한 학문적 동반자이셨던 고려대학교 식품공학과 양한철 교수님께서 우리를 볼 때마다 ‘새끼 불독들’이라는 표현으로 유 교수님의 저돌적이고 끈질김을 나타내는데 사용하시곤 하셨습니다. 
 교내에서는 연세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공과대학장을 거쳐 대학원 중심교육을 추구하는 중요한 전환기에 대학원 원장을 맡으셨고 부총장을 시작하시는 시점에 일어난 한총련 연세대 점거 농성 사태에서는 헌신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시는 뛰어난 행정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교육과 연구에 남다른 열정과 탁월성을 보여주셨던 교수님께서는 우리나라 학회의 필요성도 일찍이 인지하시고 한국산업미생물학회를 창립하시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셨고 회장으로 역임하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생명공학계에서 자랑하는 학회로 발전시키는데 큰 힘을 보태셨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식품과학회 부회장, 국제미생물학회 한국대표 등을 역심하시면서 식품학계와 생명공학계를 대표하는 학자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나는 불평보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구하는 이가 얻고 찾는 이가 찾으며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씀을 언제나 믿고 자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구절처럼 미생물의 진리를 찾아 언제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유 교수님은 평생을 교육계에 몸담으시면서 스스로 ‘미생물은 창의력을 가지고 노력하는 자를 배반하지 않는다.라는 신념을 지닌 채 맡으신 인재 양성과 연구에 항상 최선을 다하셨고 자신이 지녔던 지식을 국가 정책에 반영되게 해 국민의 복리 증진에 힘을 보태셨던 열정적 실천인으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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