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학부] 故 이진주 교수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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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Date |
- 20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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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배종태 KAIST 교수
1. 이진주 박사님과의 만남
당시 KAIST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과목이므로 알아두면 도움이 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던 연구관리 수업이었지만, 수업시간이 거듭될수록 필자는 이 분야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빈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이 박사님의 열정적인 강의는 필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고, 마침내 필자는 KAIST에서 기술경영분야를 전공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이 박사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다. 그로부터 필자는 석/박사과정 지도학생으로서, KAIST 제자교수로서, 이 박사님과 지근거리에서 25년의 긴 시간동안 동행하게 되었다. 이 박사님과의 만남은 필자의 학문적인 삶을 바꾸어 놓았으며, 필자에게 이 만남은 크나 큰 축복이었다.
리더십의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박사님은 기술경영 부문의 선구자적 삶을 통해 제자들에게, 다른 학자들에게, 또한 정책담당자들과 산업계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니 이 박사님이야말로 학자이자 진정한 리더이셨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학의 졸업식에 초청되어 졸업생들에게 행한 유명한 연설에서 “여러분들의 현재의 순간들 (Dots)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 (Connect)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는 삶의 여정에서, 되돌아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여러 사건들이 서로 얽히고 연결되어 큰 필연으로 나타나는 것은 스티브 잡스 뿐만 아니라, 이 박사님이 걸어오신 길에도, 그리고 필자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생각된다.
2. 이진주 박사님이 걸어온 길
이 박사님은 대학 졸업 후 ROTC 1기생으로 육군병기학교에서 교관으로 군복무를 하셨는데(1963-1965), 당신께서 ROTC 1기생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육군 장교로서의 체험이 평생 현재와 미래의 경영자들에게 리더십을 가르치신 이 박사님께는 아마도 실전을 경험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육군 소위로 제대한 이후 이 박사님은 기계과 출신으로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의 길을 선택하셨다. 중앙일보 기자로서 보낸 20대 중반의 3년간의 시기(1965-1968)는 이 박사님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같은 신문사 기자이던 사모님을 만나게 된다.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김민숙 사모님은 그 당시 사진기자이셨고, 이 박사님은 사회부 초년병 기자로서 사건현장을 뛰어다니셨다.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그 연구결과를 기업현실과 정책현장에 적용하려고 노력하셨던 이 박사님의 모습은 신문기자로서의 독특한 이력에서 그 뿌리를 볼 수 있다. 이 박사님의 탁월한 문필력도 기자 시절 당시의 소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박사님의 기자로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사회현장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시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이 박사님은 당시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의 메카이던 KIST에서 연구원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셨다. KIST에서 연구원으로의 생활 (1969-1971)이 이 박사님께서 평생을 연구하는 자세로 살아가시는 습관의 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KIST에서 이 박사님은 과학기술정책 분야를 처음 만났고, 이때의 경험은 후에 박사논문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KIST에서의 이 박사님은 더 큰 세상을 접하고 더 넓은 학문을 공부해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가질 수 있었고, 이는 남들보다 뒤늦게 미국유학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당시 이 박사님의 나이 31세가 되던 1971년의 일이었다.
이 박사님이 노스웨스턴 (Northwestern)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신 것은 먼저 유학을 떠난 선배, 친구들의 추천이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학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고 미국 대학에 대한 정보도 제한적이던 시절이라, 선배와 친구들이 명문대학이라고 추천한 노스웨스턴 대학을 큰 고민 없이 선택하셨다. 당시 노스웨스턴 대학 산업공학/경영과학과에는 기술경영분야의 대가이시고 27년 동안 (1959-1985) 기술경영분야 저명학술지인 IEEE Transactions on Engineering Management의 편집장(Editor)을 맡으셨던 루벤스타인 (Albert Rubenstein) 교수님이 계셨다. 그렇지만 이 박사님이 처음부터 기술경영을 공부하려고 노스웨스턴 대학으로 가신 것이 아니었고, 기계공학의 배경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 적은 계량분야를 전공하실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노스웨스턴 대학에 도착한 이 박사님을 먼저 찾은 것은 루벤스타인 교수님이셨다. 당시 루벤스타인 교수님은 한국의 과학기술발전에 대해 막 연구를 시작하던 참이었고,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중심이었던 KIST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는데, 마침 KIST 출신이 박사과정에 입학을 했다는 것을 아시고 먼저 찾으셔서 조교직과 장학금을 제안하면서 이 연구에 이 박사님이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 제안은 이 박사님께는 매우 좋은 조건이었지만 유학 당시의 생각과 달랐기 때문에, 이 박사님은 며칠을 고민하고 나서 아무래도 거절을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루벤스타인 교수님을 찾아갔다. 이 박사님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만 ...”이라고 말하는 순간, 루벤스타인 교수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Thank you" 라고 소리치셨다. 동양문화의 겸양을 바탕으로 거절할 때도 먼저 상대방을 배려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는 것이 당시 이 박사님의 서툴렀던 영어표현과 결합되면서 루벤스타인 교수님은 본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아셨던 것이다. 이것으로 그 날의 미팅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결론이 났고, 이 박사님의 전공과 지도교수도 결정되었다.
이 박사님은 그 다음 날부터 두꺼운 책과 논문에 파묻혀 고생스런 유학생활을 시작하셨다. 이처럼 이 박사님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우연과 함께 새롭게 전개되었다. 루벤스타인 교수님과 수행한 프로젝트는 이 박사님의 박사논문 주제로 연결되었고, 마침내 1975년에 그간의 노력은 약 5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박사논문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 긴 논문의 타이핑은 사모님이 맡으셨는데, 당시에는 워드프로세서가 없던 시절이라 원고를 수정하면 같은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타이핑을 해야 했으니, 사모님도 무척 고생을 하셨을 것이다. 이교수님의 박사논문은 기술혁신과정의 각 단계 (아이디어 창출 ➜ 문제 해결 ➜ 실용화 및 확산) 별로 프로젝트 성패요인을 분석한 것으로, 1980년에 이 분야 최고권위 학술지인 Research Policy에 게재되었다.
루벤스타인 교수님은 무척이나 다감하신 분이셨던 것 같다. 프로젝트 수행 및 논문지도 과정에서도 멀리 한국에서 온 유학생을 따뜻하게 배려하셨고, 부부를 댁으로 초청하여 격려하기도 하셨다. 필자는 이 박사님이 KAIST에서 학생들을 대하시는 온화한 모습을 늘 접하면서 이러한 모습도 이 박사님의 스승이신 루벤스타인 교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유산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필자가 루벤스타인 교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당시 투병 중에 있던 이 박사님 안부를 묻고 함께 걱정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이 박사님은 바로 1975년 7월에 KAIST 산업공학과로 부임하셨다. 당시는 KAIST 설립 초기라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지만 학생들의 열정은 남달랐다. 특히 당시에는 KAIST 석사과정을 졸업하면 병역면제혜택이 주어지던 시절이라, 경영/경제 등 인문계 학과를 졸업한 우수학생들도 별도로 입시준비를 해서 KAIST 산업공학과에 입학하였고, 군에서도 다수 우수인력들을 선발하여 KAIST에 파견교육을 시켰다. 당시 졸업생들은 그 후 정부/기업/군 등 각 분야에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 박사님이 KAIST 산업공학과에 부임하신 후 품으신 또 하나의 꿈은 우리나라를 선도할 기술과 경영을 함께 이해하는 경영자를 키우는 것이었다. 이 박사님의 이러한 꿈은 평생 동지였던 안병훈 교수님과의 공동노력을 통해 1980년에 경영과학과 분리/독립으로 첫 열매를 맺었다. 그 후 산업경영학부장으로 있으시면서 1994년에는 삼성그룹과의 협력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식 전일제 MBA 프로그램인 기술경영전공 (Techno-MBA)을 설치하는데 기여하셨고, 이는 1997년 테크노경영대학원을 설립하는 모태가 되었다.
아울러 이 박사님은 산학협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셔서, 1994년 KAIST 대전캠퍼스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창업보육센터인 KAIST TIC/TBI 설립을 주도하셨고, 1995-1998년에는 잠시 학교를 휴직하고 한국생산기술연구원장을 맡기도 하셨다. 1998년에 학교로 복귀하신 후에는 테크노경영대학원 안병훈 초대원장님의 뒤를 이어 제 2대 테크노경영대학원장을 맡아 세계적인 경영프로그램을 만드시겠다는 평생의 꿈을 실현하는데 매진하셨다. 아울러 한국중소기업학회(1998)와 기술경제학회(2001)의 회장직을 맡으셔서 학회의 발전에도 많은 노력을 하셨다.
그러나 2000년 1월, 테크노경영대학원장으로서 동계 교수 워크샵을 주재하시던 이 박사님이 회의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시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학교발전을 위한 Fund Raising 등 제반 현안 이슈에 따른 과도한 스트레스와 격무가 뇌출혈을 일으킨 것이다. 빠른 수습으로 큰 위기는 넘겼지만 왼쪽 마비는 막을 수가 없었고, 그 이후 이 박사님의 길고 힘겨운 재활노력이 계속되었으나 끝내 다시 회복하여 백두대간을 오르시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셨다.
불편하신 몸으로 2006년 정년퇴임을 하시기까지 모든 힘을 강의와 재활에 쏟으셨다. 특히 필자는 2001-2006년에 이 박사님과 Team Teaching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함께 강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 박사님의 농축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귀한 말씀들을 다시 한 번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 박사님의 삶의 여정은 서로 연관되지 않을 것 같은 여러 경험과 경력들이 쌓이고 얽혀서, KAIST라는 Platform 위에서 멋지게 완성을 향해 진행된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끝내 불의의 뇌출혈로 건강을 잃으시고 그 모든 노력을 중단해야 했던 것은 이 박사님은 물론이고 제자들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이 박사님의 뇌출혈은 삶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다시 건강을 되찾으시려는 강한 집념으로 피나는 재활노력을 하시면서, 관심분야도 과학기술과 경영에서 인생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상념으로 바뀌셨다.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이렇게 온 몸으로 건강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으니 부디 건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늘 이르셨다. 회복 속도가 빠르면 크게 기뻐하셨다가 또 생각만큼 진전이 안 되면 낙담하시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회복이 되리라는 희망을 놓으신 적은 없었다.
이 박사님은 원래 가톨릭 신자이셨지만 말년에는 불교사상에 심취하셨다. 많은 책을 읽으셨고, 읽고 좋다고 생각하시는 책들은 여러 권을 사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셨다.
이 박사님은 2006년 8월 정년퇴임과 함께, 그간 사모님의 노력으로 일구어 놓으신 강원도 홍천의 자택으로 이사를 하셨다. 2007년 봄 제자들이 이 박사님의 홍천 자택을 찾았을 때만 해도 교수님이 많이 야위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산과 내, 꽃과 나무들 속에서 편안한 모습을 뵐 수 있었다. 그런데 2007년 7월에 갑자기 이 박사님이 유명을 달리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제자들은 모두 망연자실했다. 황망하게도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셨는지. 2007년 봄부터 이 박사님은 다시 건강이 회복하리라는 희망을 접으셨다고 했다. 희망이 없어지자 모든 것이 빠르게 나빠져 갔다. 평생을 집념으로 살아오신 분이 그 끈을 놓으셨으니,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렇게 이 박사님은 사랑하는 사모님과 자녀들, 그리고 제자들을 남기시고 먼 길을 가셨다. 
3. 이진주 박사님의 교육관과 학문세계
제자들이 기억하는 이진주 박사님은 늘 미소를 띠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셔서 따지고 요구하기보다 늘 양보하고 스스로 삭히시는 편이셨다. 그렇지만 이 박사님은 본인에게는 늘 엄격하셨고 제자사랑은 유별나셨다. 제자 한 사람 한 사람과 따뜻하고 깊은 인격적 교감을 하시고, 늘 제자들이 자신을 넘어서라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을 즐겨 쓰셨다. 논문지도학생들 뿐 아니라 이 박사님의 과목수강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문이름을 다 기억하시고 학생들의 관심사에 늘 귀를 기울이셨다.
이 박사님은 학생들에게 늘 원효대사의 화쟁 (和諍)사상을 강조하셨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논리 (깨달음)에 근거하여 종합과 소통/중용을 추구하셨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학제적 접근을 통해 타 학문을 포용하면서, 끊임없이 연구/관심 영역을 확장하고 공학·경영·사회·정책·인문을 섭렵하는 제자들이 되기를 원하셨다. 기술혁신이론을 경영혁신 (기업문화)에 적용하여 하드 혁신 못지않게 소프트 혁신을 강조하셨다. 아울러 학문-현장의 경계를 타파하고, 대학·기업·정부에 진출한 제자들이 차별 없이 존중하고 서로 배우도록 유도하셨는데, 이러한 교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 모임에서도 그대로 남아있다.
이 박사님이 추구하신 것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실천학문’이었다. 학자로서 대학 연구실에만 갇혀있는 그들만의 학문이 아니라, 기업·정부·대학·사회가 고민하는 문제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대안제시에 주력하셨다. 특히 이 박사님이 창안하신 경영혁신의 네바퀴 이론, 옴살스런 (Holistic) 경영의 개념은 지금도 매우 유효하고, 기업가정신 (Entrepreneurship) 연구의 개척자이시면서 늘 벤처윤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대형연구사업 기획기능의 강화 등 실현성이 높은 과학기술정책도 많이 제안하셨고, 또 적용되었다.
특히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에는 중소기업, 전통산업, 사회적 기업 등 ‘을’을 위한 학문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하셨다. "다시 경영학을 한다면 약자 관점에서 그들을 위한 연구를 하고 싶다"며 투병생활 중 남긴 말씀은 이제 제자들에게는 유언처럼 남아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현안 이슈로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 박사님은 지도층과 대기업의 도덕적 해이와 천민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단순히 경제적인 부를 이루는 성공(Success)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를 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핵심역할(Significance)을 해주기를 원하셨다.
그간 이 박사님이 직접 논문지도를 통해 배출하신 제자만도 박사 35명, 석사 91명에 이른다. 이 박사님의 제자들은 현재 학교/연구소, 행정부, 산업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고, 우리나라 기술경영, 기술전략 및 정책분야의 기반과 핵심그룹을 창출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 박사님은 본인의 연구영역을 ‘혁신연구’ (Innovation Studies)라고 소개하셨다. 구체적으로 이 박사님의 연구영역은 ① 기술경영/전략, ② R&D관리/신제품개발, ③ 과학기술정책, ④ 중소/벤처기업 연구, ⑤ 사용자중심의 MIS(경영혁신 포함) 등 5개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박사님은 혁신 중에서도 ‘기술혁신’ 연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지만, 기술혁신 뿐만 아니라 ‘경영혁신’과 ‘문화혁신’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셨다. 특히 경영연구에 있어서도 다양한 접근방법을 통합하는 전일적 (全一的) 관점을 강조하셨다.
이 박사님은 학문적으로는 우리나라 기술발전에 있어 기술도입과정과 기술혁신에 대한 이론적 공헌을 선두주자로 수행하셨고, 이와 연계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 중소기업관련 전략연구, 기업의 기술전략 및 경영 등 경영교육에서 기술부문의 틀을 잡으셨다. 해외논문 40편을 포함하여 전부 80여 편의 논문과 다수의 관련 글을 쓰셨고, 국내 경영분야에서는 최초로 해외유수학술지의 최우수논문상을 받기도 하셨다. 이 박사님의 평생의 업적은 경영학계에서도 널리 인정받아, 2005년에는 우리나라 경영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업적을 기려 한국경영학회가 수여하는 상남경영학자상을 수상하기도 하셨다.
이 박사님은 우리나라에서 기술경영 분야의 교육과 연구에 주춧돌을 놓으신 개척자적 학자 (Academic Entrepreneur)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의 경영이론을 배우고 기반으로 하되, 지나친 환원주의 (Reductionism)의 약점을 옴살 (Holistic) 경영을 통해 보완하고 동양의 접근방법을 연계하시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 연구분야 간 연계와 다양한 시각/접근방법을 강조하신 것은 원효대사의 화쟁 (話諍) 사상을 자주 언급하신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술혁신이론에 있어서도 선진국 모형에서 출발하되 우리나라 상황을 설명하는 개발도상국 이론 (모형) 개발에 역점을 두셨고, 이론을 실제에 다양하게 적용하려고 시도하셨다. 이 박사님은 ① 혁신의 네바퀴 모형, ② 제3세대 R&D 관리, ③ 기술혁신의 총체적 모형, ④ 전략적 변곡점의 중요성, ⑤ 혁신의 전주기 관리, ⑥ 소유보다 활용에 초점을 둔 기업가정신, ⑦ 사용자중심을 즐겨 언급하셨고, 주된 연구주제는 시대 상황에 따라 [R&D관리⇒기술경영⇒MIS/중소기업⇒기술경영]으로 변화하셨지만, 이 모두 혁신연구의 범주에 있다고 하겠다. 제자들에게 특히 Integrity (正道경영), Noblesse Oblige, Servant Leadership을 강조하셨고, 연구결과의 현장 응용을 강조하셨다.
4. 이진주 박사님의 삶과 학문
이진주 박사님은 평생 ‘삶과 학문의 일치’를 추구하셨다. 무엇보다 학문은 치열한 현장, 진지한 삶 속에서 개화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학문은 현장이해와 문제해결의 이론적/실천적 수단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지행일치 (知行一致) 그리고 가치 있는 삶 속에서 진정한 학문의 완성을 향해 노력하셨다.
이 박사님은 늘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해 오셨다. 1970년대에는 기술혁신, 기술경영, MIS (90년대 정보혁명)에 역점을 두셨고, 1980년대에는 벤처연구와 경영혁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셨다. 1990년대에는 뉴밀레니엄을 앞두고 과학기술정책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투입하셨고, 병환 중의 2000년대에는 삶의 근본가치를 탐구하셨다.
이 박사님의 삶은 현장과 학문을 끊임없이 넘나 드셨다. 중앙일보 기자, KIST 연구원으로서 현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고, 다시 노스웨스턴 대학에서의 박사과정 기간과 이후 KAIST에서의 교수생활을 통해 학문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셨다. 그렇지만 학교에 계신 중에도 생산기술연구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등을 통해 끊임없이 현실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벤처농업, 을을 위한 학문, 미래촌 등의 활동을 통해 사회 환원을 위해 노력하셨다.
이 박사님이 가장 애송하셨던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 (Success)를 옮기면서 회상록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박사님의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낸 시이기에 필자도 어느덧 이 시의 애송자가 되었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받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주인이 되는 것 (이진주 박사님이 덧붙인 부분)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신 이진주 박사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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