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산학부] 故 이서래 교수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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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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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미경 안동대학교 교수
우리나라 농화학과 식품과학의 거두이신 황파 (黃芭) 이서래 선생님의 삶과 업적을 소개하는 일은 학문적 유지를 이어받고자 하는 제자로서 필자 (이미경)에게는 사명이며 영광이다.
필자는 근 20년 동안 제자로서 후학 연구자로서 이서래 선생님과 함께 했다. 필자와 선생님과의 학문적 인연은 특별한 사연으로 시작되었다. 필자는 ‘서울시내 대중식사중 수은의 오염실태 및 총섭취량 평가’(1989)라는 제하의 석사논문에서 수은에 의한 위해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 논문은 큰 사회적 파장과 반향을 가져왔고, 그 과정에서 식품안전성 분야의 중요성을 깨닫고 향후 연구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한국식품 중 유기인계 잔류농약의 위해평가 연구’(1996)였는데 이 연구를 시작할 당시 선생님은 『식품의 안전성 연구』를 집필하신 직후였고 잔류농약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활발히 연구하시던 때라 필자에게 식품안전성과 잔류농약에 관한 구미 선진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 후에도 계속 선생님과 학문적 견해를 일관되게 같이 함은 물론 같은 연구 관심사로 인해 필자는 선생님과 가장 많은 공동연구를 수행한 제자, 연구논문을 가장 많이 발표한 제자로 남게 되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타계하셨을 때 생전에 미처 마무리 못하신 일들을 매듭 짖고 유지를 받드는 몇 가지 일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식품안전성』저서의 발간이 최우선 과제였다. 다행히 이 책은 집필과정에 필자가 많이 관여했던 까닭에 내용과 구성에 무리가 없어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자유아카데미 출판사의 지원으로 일 년 뒤인 2008년에 간행될 수 있었다. 출판된 책을 받았을 때 마치 그것이 선생님의 유골함처럼 느껴져 한없이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살아생전에 선생님은 Jose M. Concon이 집필한 『Food Toxicology』란 책을 소개하며 저자가 선생님과 학문적 배경이 매우 유사하고 같은 전공영역을 구축한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책이 유고 작인데 이렇게 학자의 사후에 누군가가 정리해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선생님을 마지막 뵈었을 때 필자에게 남기고 싶은 말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만약 한 마디 더 남기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아마 이 책의 개정일 것이다. 사실 선생님은 생전에 필자에게 그 책의 개정을 약속받으셨다. 독성학 분야에서 권위가 인정되는 『Casarett and Doull's Toxicology』책의 제목에 대한 내력을 설명해주시고는 이후에 필자가『식품안전성』책의 개정판을 내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책 제목이 『Lee and Lee's Food Safety』가 되지 않겠냐고 흐뭇하게 웃으셨던 일을 잊을 수 없다.
한편 선생님은 한국식품과학회에서 출간하는 Food Science & Biotechnology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학들이 이 학술지의 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해주길 염원하셨다. 그 일환으로 선생님은 한국식품과학회에 상을 제정하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한국식품과학회에『황파 FSB 진흥상』을 제정할 수 있었다. 더불어 필자는 선생님이 소장하시던 서적을 서울여자대학교에 기증하는 일을 추진했고 단행본 138권을 대학 도서관에서 활용되도록 했다. 이것 역시 생전에 선생님의 말씀을 실행으로 옮긴 것이다.
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기신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을 정리하고 선생님과 가졌던 소중한 기억들을 모아서 펼치는 일은 가슴이 뛰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지나 않았을까? 또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여 무척 염려스러운 작업이기도 했다. 이하 본 회상록은 회갑 기념으로 1992년에 출판된 책 『연구업적요약집』, 정년퇴임을 맞이하여 1997년에 발행한 『식품연구자료집』, 출판될 예정에 있는 『황파 이서래 식품연구 50년』에서 선생님이 기록한 것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음을 밝혀둔다. 후학들이 학자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선생님이 걸으셨던 길을 되짚어 주길 바란다. 
학창 시절
선생님은 현재 경기도 중요민속자료 123호로 지정, 보존 되고 있는 수원시 파장동 생가에서 1932년 1월 18일에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다. 파장동 생가는 1888년에 지어진 초가집으로 조선말기 소농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데 실제로 보면 단아하고 소박하며 짜임새 있는 구도가 마치 선생님의 한 면을 보는 듯하다. 선생님은 선친을 많이 닮은 분이었다고 한다. 선친은 한학을 하신 분으로 공부하기를 매우 좋아해서 15세까지 서당에 다닌 후로도 독학을 계속 했고 1930~40년대에 도입되었던 새로운 농업기술을 열심히 배우고 실천하는 분이셨다. 큰 부자는 아닌 동네의 소지주에 불과했지만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걸인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식량을 빌려주고 이웃의 많은 문맹에게는 편지를 대필해주고, 사주, 택일도 해주고 이름도 지어주는 이웃에 대해 덕을 많이 쌓았던 분이셨다. 한국전쟁의 격동기 속에서 흉흉한 민심 속에서 정의롭고 공평하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존경의 대상으로 동네사람이 의지하고 따르는 분이셨고, 평소의 성격은 온화하다가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인(義人)이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생전에 자신과 선친을 비롯한 가족에 대한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파장동 생가에 대해 큰 자긍심과 애착을 갖고 계셨다.
선생님은 소학교 시절 줄곧 수석을 차지했고 졸업식에서는 경기도 도지사상을 수여받았다. 한참 전쟁의 막바지라 졸업기념 사진 한 장은 물론 앨범도 없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소학교에 입학 후 겨우 일주일 동안만 한글로 된 교과서로 공부했고 그 후로는 모두 일본어로 교육을 받았다. 선생님이 회고하시길 12세 이하에 외국어 교육을 받아서 인지 일본어를 거의 모국어처럼 구사할 수 있는 본인의 일본어 구사 능력에 스스로도 놀랬다고 하셨다. 1969년에 일본에 3개월간 머물렀을 때 선생님의 일본어 실력에 일본사람들도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님은 형님들이 구독해 보던 신문이나 월간 잡지에 구황식품에 대한 기사가 나오면 모두 스크랩해가며 자료를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식품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된 동기라고 평소에 말씀하셨다.
1951년 10월 1일부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강의를 듣는 것으로 선생님의 대학시절은 시작되었다. 대학 2학년이 되자 화학을 기반으로 하는 응용과학인 농화학을 선택하셨고 이로써 농화학의 배경을 가진 식품과학자로서의 삶이 바야흐로 시작된 것이다. 선생님은 대학과정 동안 농업생산분야, 기초화학, 그리고 농업생산 및 농산물 이용에 화학적 지식을 활용하는 농화학 전공을 이수하셨다. 선생님의 대학시절은 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했고 학자로서의 전공의 기초를 구축할 수 있었던 학문 활동의 태동기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님은 한편으로 인생에서 여러 가지 뜻이 주어지는 중요한 성장과정이 되는 대학생활을 정상적으로 누릴 수 없었던 상황을 아쉬워하셨다. 대학생활의 3년 반이 한국전쟁과 맞물려 있던 시기였고 사회적 혼란, 경제적 파탄 그리고 정신적 불안 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1955년 4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대학원 학위과정을 시작했지만 당시의 대학원은 강의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대학원생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1주일에 한 번 정도 교수님의 얼굴을 보러 나오는 정도였다. 그러던 8월 여름방학의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점심식사 후 화학실험실에서 누어서 쉬고 있는데 노크 소리도 없이 교무과장이시던 심종섭 교수님이 “너 이서래지, 미국에 유학가고 싶은가?”라는 물음에 선생님은 준비나 한 듯이 “갈 수만 있다면 가야지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1954년부터 시작된 ICA/Minnesota Project(미국 국제협력처, ICA가 재정지원을 감당하고 미네소타대학교가 돌보아주는 원조계획으로 서울 농대, 공대, 의대 3개 대학에 대하여 건물, 실험자재, 교수훈련의 세 가지를 일체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프로젝트)에 따라 미네소타대학교에서 2년간 교수요원으로 생화학을 전공으로 하고 유기화학을 부전공으로 하는 대학원 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1955년 12월 22일 무급조교로 총장발령이 나왔고 교수요원으로 해외에 파견될 수 있는 자격증을 획득했다.
1955년 12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3개월간 서울대학교 물리대 FLI (Foreign Language Institute)에서 매일 8시간씩 영어회화를 배웠고 미국 대사관에서 주관하는 영어시험에 합격했지만 출국수속이 지연되어 3월에 대학원에 다시 등록하여 석사논문 실험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은 당신이 존경하던 김호식 (金浩植) 교수님의 논문지도를 받게 되었다. 김호식 교수님은 때마침 6개월간 미국에서의 연구를 마치고 돌아오신 후였고 외국에서 수집해온 수 백편의 논문 (별쇠)을 카드에 정리하는 기회를 선생님이 가질 수 있었다. 선진국의 연구동향을 파악하는 좋은 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선생님이 이때 연구했던 내용은 “Amylase 생성능이 강한 Aspergillus oryzae 돌연변이주의 유도”로서 5개월간 부지런히 연구하여 좋은 실험결과를 얻었다. 그러던 중 지연되고 있던 미국으로의 출국 수속이 진척되어 8월중으로 꿈의 유학길에 올라야 했으므로 한 학기만 더 등록하면 끝나게 되는 석사과정을 중단해야만 했다.
선생님은 1956년 8월 10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희망차지만 힘든 유학의 고생길에 들어섰다. 환상의 나라, 미국. 시골에서만 자랐던 선생님으로서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그 좋은 환경에서 배워야 할 것과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무수히 되새기며 2년 후에는 석사학위를 꼭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처녀강의를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해서 공부에 굶주려 있던 선생님은 유학시절 5년 동안 단 한 번도 강의를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주 실시되는 시험에서 채점 후 틀린 곳을 수정해서 되돌려주는 시험답안지는 선생님에게 교육효과 100%였다고 즐거이 회상하시곤 했다.
석사에 필요한 최소 27학점을 초과하여 47학점을 유학기간 2년 동안 이수했고 식물생화학과 효소화학이 전공이었던 Samuel Kirkwood 박사의 지도하에 작성한 “The Isolation and Identification of Tyramine and Candicine from Barley Roots" 연구논문이 심사에 통과되어 결국 학점취득, 학위논문, 최종구두시험을 완료하면서 계획대로 만 2년 만에 이학석사학위 (Master of Science)를 받았다. 박사과정을 계속하라는 지도교수의 권유를 뒤로 하고 서울대학과의 계약 때문에 8월 21일 예정인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1958년 7월 20일에 귀국했고, 선생님의 1차 유학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농화학과에서 4년간 강의 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주는 연구조교 장학금을 받아 1962년 9월 17일 2차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박사학위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연속되는 시험의 지옥이었다고 기억하셨지만, 그러나 결국 필요한 학점을 모두 취득했고 2종의 외국어 시험과 대학원 강의 내용을 총괄하는 최종필기시험에 통과해 박사후보생 (Ph.D. candidate)이 되셨다. 비유하길 그것은 머리를 꿰뚫는 훈련 (drilling)이었으며 사람을 용광로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는 것과 같은 훈련과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하셨다.
박사논문은 그 당시 생화학에서 새로운 분야로 각광받고 있던 효소학 분야의 내용으로 다당류의 일종인 galactomannan의 가수분해 효소를 정제하고 그의 효소화학적 특성을 구명하는 것이었다. 실험수행은 많은 시간과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지만 시험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도교수가 있었고 연구시설이나 연구비의 조달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밤새워가며 실험을 진행하고 나온 데이터를 정리, 축적하는 일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박사학위 제출논문은 “Purification and Properties of Enzymes Which Attack Guar Gum"이었으며, 심사위원회에서 3시간 만에 통과되었고 논문에 대한 최종구술시험에 합격했다. 선생님은 1965년 8월 20일 감격적인 졸업식에 참석하여 박사 가운을 입어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 3년 만에 받은 박사학위가 얼마나 감격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미국에서 배운 것을 활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연구 여건을 잘 알고 있었고 박사후 연구과정을 밟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선생님은 사명감에 귀국을 결심했다고 한다.
왕성한 연구 활동과 헌신적인 교육
<서울농대 13년>  선생님은 1958년 석사학위를 끝내고 귀국하시자 곧 9월초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 후 1962년 9월 17일에 다시 2차 미국유학에 나섰고 박사학위를 받고 1965년 9월에 조교수로 승진하여 모교로 복귀했다. 1971년 11월 20일자로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농학연구소 2급 갑류의 연구관 겸 식품공학 연구실장의 보직을 받고 그 해 12월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했다. 선생님은 총 13년 3개월 동안 모교에서 교수로서 후학의 교육과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선생님에게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고 한다. 소속 학과의 학생에게 본인이 전공했던 과목을 강의할 수 없었고 생화학분야에 대한 연구비의 기회는 거의 없었으며 학생들은 자신들의 전공에서 가장 먼 분야를 강의하는 교수를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연구 분야를 생화학을 이용한 식품과학 즉 식품생화학 (Food Biochemistry)으로 바꿀 결심을 하게 된다. 때마침 서울대학교에 1968년 식품공학과가 신설되자 선생님은 소속 학과를 농화학과에서 식품공학과로 옮겼다. 생화학을 기초한 식품과학을 함으로써 식품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됐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지만, 생화학을 전공한 사람이 식품과학을 할 수 있느냐는 식의 주위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식품과학자로서 거듭나기 위해 post-doctor 훈련에 지원했다.
유엔기구인 FAO에서 선발하는 Andre Mayer Fellowship을 받아 1969년 1월부터 인도의 Mysore의 Central Food Technological Research Institute에서 9개월,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의 후꾸모도 교수의 大阪市立工業硏究所에서 3개월 도합 1년 동안의 훈련기간을 거쳐 식품과학자로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식품가공분야의 가장 큰 전문연구소 (직원 1천명)인 인도의 Central Food Technological Research Institute에는 부설로서 International Food Technology Training Centre가 있었다. 선생님은 그 곳에서 Food Science & Technology에 대한 세계적 연구동향을 파악하는 한편 한국에서 과잉 생산되는 고구마의 이용연구로서 고구마에 대두를 강화한 이유식 개발을 위한 연구를 했다. 강의 요청도 들어와 Food Chemistry 10시간을 강의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곳 인도에서 세계의 많은 식품과학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그 곳 연구 소장이던 H.A.B. Parpia 박사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연수과정을 마치고 귀국 후 1970년 4월 25일에 한국농화학회에서 열린 특별강연에서 ‘개발도상국을 위한 식량과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선생님은 동양이 서양보다 기술적으로 후진이고 경제발전이 느리기는 하지만 우리들의 식생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요지의 내용과 함께 인도의 타즈마할 (Taj Mahal)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 동양은 문화적으로 결코 후진국이 아님을 강조했다. 선생님은 그때가 바로 식품과학자임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일본에서의 3개월 연수기간 동안 amylase를 이용한 식품가공 이라는 연구과제로 실험을 하면서 효소이용에 관한 많은 자료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또한 서일본지역의 효소산업계와 관련 대학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져 일본의 사정을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이후 국내 산업체에 보탬이 될 수 있었다.
식품과학자로서 선생님은 연구와 강의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열심이었고, 한국식품과학회 편집간사 일을 맡아 책임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던 중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농학연구소의 식품공학연구실장 제의가 있었고, 국립연구기관에서 출연기관으로의 전환이 예상되는 연구소로 옮겨 40대의 정력과 경험을 살려 현실문제와 직결되는 연구과제에 부닥치고 싶은 강열한 의욕을 가졌던 선생님은 방사선농학연구소로의 이직을 결정했다. 향후 10년 동안 대학에서의 연구업적의 2배 이상의 성과를 거둔 후 쌓은 연구경험을 후학에게 다시 되돌려주겠다는 결심과 함께 선생님은 마침내 40년 정든 수원을 떠나게 된다. 선생님이 서울대학교에서 교수 시절 발표한 연구논문은 총 22편으로 내용별로 보면 탄수화물 분해효소의 정제 및 이용에 관한 연구 8편, 고구마의 저장 및 이용에 관한 연구 6편, 식품 및 식물의 생화학적 연구가 8편이다. 그 외 해설, 총설, 기술보고서가 8편으로 총 30편의 연구업적이 있다. 총설로서 다당류 분해효소의 특이성과 이용 (1967), 고구마의 이용에 관한 연구 (1967)를 발표했다.
1972년까지 서울대학교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은 석사졸업생은 9명이다. 이 중 이관영 박사는 1972년에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방사선농학연구소에 재직하면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선생님과 aflatoxin 생성능에 관한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이관영 박사는 그 후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Procter & Gamble Co에 근무했다. 필자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이관영 박사가 세미나 연사로 초대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당신을 매우 따랐던 제자였다고 환한 미소로 회상하시곤 했다. 서울대학교에 계시는 동안 선생님은 농화학계 및 식품과학계의 굵직한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원자력 연구시절 10년>
1971년 11월 20일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농학연구소 식품공학연구실장 (2급갑)으로서 시작한 선생님의 연구소 생활은 1982년 3월 1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이직하기 전까지 10년에 걸쳐있다. 그 동안 원자력청 산하 방사선농학연구소는 15개월간의 진통을 겪고 1973년 2월 17일자로 한국원자력연구소 (국립연구기관에서 출연연구소로 바뀜)로서 새로이 발족하고 연구실의 명칭도 식품공학연구실에서 농업생명화학연구실로 그리고  1977년에는 다시 환경화학연구실로 바뀐다. 다사다난한 연구소 분위기 임에도 대학에 비해 월등히 좋은 연구여건에 힘입어 선생님은 연구 수행에 전념할 수 있어 연구소 재직 10년간에 많은 연구업적을 쌓았다.
정부출연 연구과제로서 방사선을 이용한 곡류저장 및 안전성 연구 (1972년), 식물성 다당류의 산업적 이용연구 (1973년), 농산물중의 유독성분에 관한 연구 (1973∼6년),  오염물질의 식물대사에 미치는 영향 연구 (1974∼5년), 중금속의 미생물학적 연구 (1976년), 식품가공원료의 방사선처리 연구 (1977년), 환경오염물질의 생물학적 전환 및 제거연구 (1977∼80년), 하천수계 (낙동강)의 수질보전을 위한 조사연구 (1978∼80년), 방사성물질의 환경내 행동 및 영향평가 (1981년)를 수행했다. 또한 외부용역 연구과제로서는 다음과 같이 수행했다. 과학기술처-국산자원을 활용한 분식원료 및 제품개발에 관한 연구 (공동) (1972년), 중화학공업 추진위원회-중화학공업단지의 입지조건 및 환경조성 (1973년), 유황상사(주)/과학기술처-공업한천의 제조에 관한 연구 (1974년), 호남정유(주)/과학기술처-광양만 일대의 수질, 해상 및 생태학적 연구 (공동) (1974년), 한국전자공단/과학기술처-낙동강 수계의 수질조사에 관한 연구 (공동) (1974∼5년), 한국농약(주)-한국산 현미중의 잔류농약 분석조사 (1977년), 온산공단 협의회-온산공업단지 환경조사 (공동) (1978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Radiotracer studies on the fate & transformation of pesticide residues in the environment and food chains (1975∼78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Radiotracer studies on the fate & bioaccumulation of chemical residues in fishery products (1981∼82년).
원자력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기구 IAEA (국제원자력기구)와의 국제협력 연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선생님이 환경화학 및 분석 분야에서 국제적 수준의 전문성을 가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의 국제협력연구였던 ‘“Radiotracer studies on the fate and transformation of pesticide residues in the environment and food chains’ 는 10개국이 관여하는 협동과제였는데 처음 계약기간은 3년이었으나 2년이 더 연장되어 5년간 (1975∼79년) 계속되었다. 연구결과는 2년 간격으로 5일간씩 열리는 FAO/IAEA Research Coordination Meeting에 3회 (1976, 1978, 1980)나 참석하여 발표되었고 선생님의 이러한 국제적 활동과 경험은 FAO, WHO, IAEA와 같은 국제기구의 활동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향후 잔류농약 규제에서 Codex 활동을 이해하는 데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셨다.
한편 선생님은 FAO/IAEA Research Coordination Meeting에서 분석성분의 검출한계 (limit of detection)를 검출한계의 절반 값으로 수치화하는 것을 생각해 내셨다. 검출한계의 수치화는 최근에야 위해성분의 위해평가에서 논의되는 것으로 그때 선생님의 의견대로 검출한계의 절반 값으로 수치화하는 것이 한 방법으로 권고되고 있다. 가스크로마토그래프를 사용한 미량성분의 분석 실험결과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학술지에 발표한 것도 선생님인 것으로 안다. 이렇게 선생님은 원자력연구소 시절 미량성분의 분석 연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다.
선생님은 앞에서 언급한 1970년대 환경조사사업과 관련된 많은 연구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국내 환경문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고 우리나라에 환경전담부서가 창설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셨다. 환경연구에 착수하면서 미국 Argonne National Laboratory에서 개최된 IAEA 주최 원자력발전소의 환경영향평가에 관한 국제연수과정을 이수 (1980. 3.15 - 4.27) 하는 등 해외에서 여러 오리엔테이션을 받기도 했고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연구자문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IAEA 기술원조계획에 의거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환경독성학과의 R.I. Krieger 교수도 환경독성학 전문가로 초청하여 1979년 10월 한 달간 연구자문을 받기도 했는데 선생님은  R.I. Krieger 교수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세미나를 하도록 주선했고 이를 통해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농화학이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가 환경독성학을 도입해서 부흥한 것처럼 서울대학교 농과대학도 새로운 분야인 환경독성학을 도입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바램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고 선생님은 회상했다.
1977년에는 환경청 (후에 환경처, 환경부로 승격)이라는 새로운 부처가 탄생하면서 선생님은 연구업무 내용을 넘겨주게 되고, 1981년부터는 원자력발전소의 신설 및 가동이 본격화되면서 환경방사능 분야로 연구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생화학에서 시작해서 식품과학으로 다시 환경보전 이라는 전공의 구축에 25년이 걸렸는데 또 다시 환경방사능으로 연구방향을 바꾸는 일에 선생님은 부담을 느끼셨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원자력연구소 생활 10년 3개월, 이제 청산해야 할 시기임을 선생님은 감지했다. 원자력연구소에 있던 동안 선생님은 좋아하는 전공을 너무 멀리 해서는 안 되겠다는 일념으로 어려운 시간을 내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식품화학 강의를 계속 맡아 하셨다. 이를 계기로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교수로 자리를 옮기시게 되는데, 선생님은 연구소 생활 10년이 서울대학교를 떠날 때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에 대해 매우 흐뭇해 하셨다.
이른바 ‘성장의 시기’인 1970년대에 원자력연구소에서 연구에만 정력을 기울여 10년 재직 중 발표된 연구 성과는 연구논문 65편, 해설, 총설, 기술보고서 등 63편, 합계 128편이나 된다. 식품의 방사선 저장 및 가공기술에 관한 연구 16편, 환경오염 및 수질조사 연구 20편, Mycotoxin의 검색 및 생성에 관한 연구 8편, 농수산물 중 잔류농약에 관한 연구 8편, 기타 식품과학 및 환경보전에 관련된 연구 13편이 있다.
그 중 Aflatoxin과 같은 Mycotoxin에 관한 연구는 당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곰팡이독소 연구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Mycotoxin 연구에 참여했던 공동연구자는 이관영 박사, 김영배 박사 (고려대교수로 재직중 순직함), 최언호 박사 (서울여대 교수로 재직중 순직함), 김용화 박사 (현재 한국화학연구소 재직) 등이었다. 그때의 Mycotoxin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는 총설로서 ‘Present status of mycotoxin studies in Korea (1985)’에 정리해두셨다. 한편 1976년 ‘남해안산 수산식품 중 유기염소계 잔류농약에 관한 조사연구’를 필두로 해서 김용화 박사등과 함께 유기염소계 농약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산 현미중 BHC의 잔류성 연구 (1978)’, ‘Elimination of BHC residues in the polishing and cooking processes of brown rice (1979)’, ‘한국산 우유중 유기염소계 잔류농약의 검색 (1980)’, ‘Behavior of 14C-BHC residues in rice grain (1981)’ 등의 연구논문을 쏟아내셨다. 선생님은 국내에서 BHC 농약의 사용금지는 위해평가 결과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지나치게 성급한 조치였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Mycotoxin과 잔류농약 연구 수행을 통해 얻었던 경험이 식품의 안전성 이슈의 사회적 태동과 위해물질에 대해 정부 규제가 미치는 파급효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원자력연구소 재직시 선생님이 지도했던 석사과정 학생은 학위 취득년도 기준으로 1974년부터 1981년까지 5명이 있다. 이 중 이영화 박사는 현재 미국 FDA에 근무하고 있으며 강명희 박사는 한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해 있다. 선생님의 공동연구자로서 발표한 공동연구논문수로 보면 최언호 박사 17편, 김용화 박사 12편, 이관영 박사 11편의 순이다.  
<이화여자대학 교육 15년>
 1982년 3월 1일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발령을 받고 전임교수로 다시 대학 강단으로 돌아오신 선생님은 1997년 2월 28일 정년퇴임까지 15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고 쌓았던 전문지식과 연구경험을 사회에 환원하셨다. 서울대학교를 떠나 원자력연구소로 이직하면서 결심한 바를 그대로 실행에 옮기신 것이다.
대학은 교육기관으로서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 우선하고 학문발전을 위한 연구노력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선생님 지론이었다. 훌륭한 강의, 학생이 필요로 하는 교육을 시키려면 교수는 마땅히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되고 연구 활동을 계속하여 학문적 호기심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이런 까닭에 선생님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강의시간에는 물로 실험실 모임에서도 열정을 잃지 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에 있으면서 선생님이 아쉬워했던 점은 잘 훈련시켜 연구를 추진하고 싶은 단계에 겨우 이르게 되면 곁을 떠나는 일이 잦고 명문대학의 남학생과 비교할 때 사회진출이 부진하여 연구의 연속성이 계속되지 못하는 점이었다.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로 온 지 8년 만에 선생님은 안식년 (연구년)을 맞았다. 학문에 입문한 이후 처음으로 여유 있는 시간과 마음으로 안식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문교부의 대학교수 해외파견 연구계획의 일환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 (UCD)에 가서 연구 활동을 지속하셨다. 환경독성학과 T. Shibamoto 교수의 배려로 1987년에 새로이 준공된 Meyer Hall 4층에 있는 작은 사무실과 실험실에서 지내셨다. 선생님은 오전 8시경에 실험실에 나와 오후 5시경까지 실험을 하고 밤에는 Meyer Hall의 Toxicology Documentation Center와 도서관을 방문하여 열심히 food safety 특히 risk assessment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셨다. 그때 UCD에 유학중이던 학생은 선생님이 교수 신분으로 온 방문교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근면함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측면은 선생님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면 누구라도 쉽게 수긍하는 선생님의 일면이다. 이때 한 실험 중 하나는 쌀의 조리가공 중 chlorpyrifos 농약성분의 행방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결과를 Journal of Agricultural and Food Chemistry에 발표했고 그것은 다시 미국 환경청 (EPA)의 Chronic Dietary Exposure Assessment for Chlorpyrifos RED with Updated Values for Anticipated Residues, Revised after Public Comments. June 22, 2000.에 인용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수집했던 식품안전성에 관한 자료는 귀국 후 『식품의 안전성 연구』(1993년도 출판)라는 이화학술총서를 집필하는데 활용하셨다. 이 책은 당신께서도 역작으로 여기셨는데 국내 식품안전성 분야에 큰 획을 긋는 저서로 평판이 나있다. 선생님은 식품독성학 (Food Toxicology) 또는 식품안전성 (Food Safety)이란 새로운 분야의 선진지식을 특유의 과학적 센스로 소개하고 아울러 1990년까지의 국내의 규제현황과 연구현황을 알렸다. 게다가 주제마다 선생님의 학문적 소견과 향후 위해물질 규제에서의 방향과 비전을 담고 있어서 장 하나하나가 훌륭한 총설 (scientific review)인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의 집필 당시 선생님의 지도하에 석사학위를 받은 직후였는데 국내 문헌 수집을 선생님으로부터 요청받았다. 필자는 열의를 가지고 서울시내의 거의 모든 대학과 정부기관을 돌아다니며 문헌을 수집하고 꼼꼼히 정리했다. 돌이켜보면 이 책은 선생님의 역작일 뿐 아니라 필자에게 운명과도 같은 책인 듯하다.
선생님의 또 하나의 역작도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 동안 출판되었는데, 1986년에 한국문화총서 제15권으로 출판된 『한국의 발표식품』책이 그것이다. 그 당시는 한국학 그리고 전통식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던 때라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던 선생님은 집필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이 책은 문화공보부 추천도서로 지정되었고 발효식품을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다.
선생님은 학자 그 이상, 그 이하를 원하지 않았으며 대학 보직을 바라지 않으셨지만, 정년 2년을 남겨놓고 2년 임기의 식품영양학과 학과장직을 수락하셨다. 15년 동안 머물렀던 학과에 대한 봉사의 마음으로 학과장 자리를 맡으셨다고 했다. 학과장은 영어로 표현하면 Department Head와 Department Chairperson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학과의 업무를 책임지고 발전적으로 이끌어가도록 하는 행정적 숙련성이 있는 교수가 상당한 권한과 임기가 주어지는 전자가 아니라 학과 교수가 돌려가며 학과의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후자의 경우가 많다고 하시며 대학 행정의 발전적인 표상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하셨다.
선생님은 이화여자대학교 재직동안 연구논문 76편, 해설, 총설, 기술보고서 등 57편, 합계 133편의 연구업적을 남기셨고 연구논문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식품의 구성성분 및 품질특성에 관한 연구 26편, 식품 중의 천연 유해성분에 관한 연구 14편, 식품 중의 잔류농약에 관한 연구 11편, 식품 중의 중금속에 관한 연구 11편, 기타 식품과학에 관련된 연구 14편이 된다. 또한 석사 46명, 박사 8명, 총 54명을 길러내셨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모두 받은 제자 중 현직에 있는 제자로서 김희섭 박사(수원대학교 교수), 윤재영 (안산대학교 교수), 이정희 (농심음식문화원 연구원), 전향숙 (한국식품연구원 안전성연구단장), 이미경 (안동대학교 교수), 장현주 (한국식품연구원 연구원)가 있다.
선생님의 정년퇴임 기념자리는 지도했던 대학원 학생과 가족, 몇몇의 지인과 함께 조촐히 진행되었다. 필자는 1997년 1월 15일 박사후 연구과정을 위해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로 출국했던 때라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출국을 미뤄서라도 참석해야 했는데 지금도 매우 후회되고 아쉬워하는 일이다. 정년퇴임을 기념해서 선생님이 소박하게 정리한 책이 1997년도 2월에 출간한 『식품연구자료집』이다. 그 책에는 식품연구-그 계획과 설계, 연구논문 작성법, 식품분야 연구기관, 식품분야 학회현황, 식품분야 교육기관, 식품과학발달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품연구 40년의 회고가 실려 있다. 이 책은 학자의 삶을 꿈꾸는 젊은 과학도가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시대를 앞선 학자의 소중한 지견과 경험을 담고 있다. “식품연구 40년의 회고” 는 『황파 이서래 식품연구 50년』으로서 출간될 예정이다. 여기에는 정년퇴임 다음의 일과 선생님의 연구업적 그리고 기록사진들이 포함될 것이다. 
<학회활동과 사회봉사>
선생님의 전공분야에서 처음 발족한 학회는 1960년 3월에 창립한 한국농화학회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 강단에 선지 2년만의 일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과학기술 진흥정책이 수립되면서 학술활동도 활성화되기 시작해 여러 전문학회의 설립이 촉발되었다. 선생님은 불타오르는 학문과 젊은 혈기로 한국생화학회 (1967년 창립), 한국영양학회 (1967년 창립), 한국식품과학회 (1968년 창립) 세 학회의 창립회원으로 가입, 활동하셨다. 한국생화학회에서는 평의원을 거쳐 감사, 부회장, 회장을 역임했다.
선생님의 주력 학회로 볼 수 있는 한국식품과학회에서는 1971년에는 편집간사, 1972년에는 총무간사를 맡아 열정적으로 봉사했고 1974∼77년 사이에는 식품문헌 초록위원장을 맡아 국내에서 발행되는 식품관련 논문을 모두 탐색한 다음 영문초록을 작성하여 영국에서 발행되는 국제초록잡지인 Food Science & Technology Abstract에 게재하는 작업을 했다. 1978년에는 학회살림을 도맡아 보는 간사장이 되어 농수산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는데 일익을 담당했고 그 다음 1979∼88년 사이에는 식품용어위원장을 맡아 식품관련 용어를 수집, 정리한 다음 식품과학용어집을 발행하는 사업을 감당했다. 한편 1977∼88년에는 국제식량이공학회 (IUFoST)의 한국대표로 있으면서 식품과학회의 국제협력에 노력했고 1982∼83년에는 식품과학회 부회장, 10년 후인 1992∼93년에는 회장을 역임했다. 정년퇴임 후에도 학회를 위한 선생님의 역할과 봉사활동은 계속되었다. 1986년에는 식품위생 분과위원회를 신설하여 1989년까지 선생님이 위원장을 맡았으나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식품산업계에서 식품안전성에 대한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때인지라 분과위원회의 활동을 위한 재정 확보가 용이하지 않았고 더욱이 1986년 한국식품위생학회가 발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식품과학회 분과위원회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식품의 위해사고나 안전성 논쟁이 일어나기 전에 예상되는 문제를 사전에 연구하고 있다가 사회적으로 논의될 때에는 빠른 시일 안에 객관적으로 위해성을 평가하여 유무해 여부를 판정하기 위한 자료를 제공해야 되며 이렇게 해야만 국민보건과 식품산업 모두를 위하는 것이고 이것이 학회의 할 일이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식품과학자로서의 공적과 학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에는 한국식품과학회 창립10주년기념 학술상 그리고 2004년에는 공로상을 수상했다.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면서 1977년 환경보전법의 제정, 1980년 환경청의 발족에 따라 환경관련학회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선생님과 당시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교수였던 고 박창규 박사님 등의 농학 배경의 환경과학자가 한데 모여 1981년 3월에 한국환경농학회를 창립했다. 환경농학 (Environmental Agriculture)이란 농수산 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학문으로서 농업환경학회라는 이름 대신에 새로운 개념을 주기 위한 용어로 채택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편집간사,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부회장, 그리고 1994년에는 회장으로서 학회의 초석을 닦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셨다.
대학교수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을 생활의 수단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활용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은 정부당국이나 공공기관에 대한 자문역할을 하는데도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부당국의 자문위원으로는 1976∼80년 사이에 문교부의 정부조사연구용역 심사위원으로 농수산분야의 연구과제들을 심사했고 1977∼80년에는 농수산부 농약심의회 위원으로서 농약의 등록과정에서 잔류독성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그 내용이 입법 조치되는데 기여하셨다. 환경분야에서는 1978∼89년까지 중앙환경보전 자문위원으로 보건사회부, 환경처의 위촉을 받아 수질 및 토양부문에서 정책입안에 관여했으며 1987∼90년에는 종합과학기술(후에는 국책연구개발사업) 심의위원으로 과학기술처의 위촉을 받아 환경보건분야의 연구과제들을 심의했다. 식품과학분야에서는 1985∼89년에는 농촌진흥청 산하의 농촌영양개선연수원에서 농촌지도관으로 겸임발령을 받아 연구지도 사업을 도왔으며 1993년부터는 농협중앙회에서 식품가공분야 업무를 추진함에 따라 운영자문위원으로서 봉사했고 1992∼96년에는 한국식품개발연구원의 이사로서 활동하셨다.
선생님이 전문성을 가지고 행정부의 정책심의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77년부터 시작한 보건사회부 (그 후 보건복지부, 현재의 보건복지가족부)에서의 식품위생 심의위원으로서의 활동이다. 정년 때까지 20년간에 걸쳐 소속분과는 바뀌었지만 식품분과, 식품첨가물분과, 오염물질분과, 국제규격분과에서 식품에 관련된 기준규격안을 심의했고 식품의 유통과정이나 안전성에서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대책연구에 열중하셨다. 정년퇴임 후에도 식품위생심의위원회의 일에 열성으로 활동하셨으며 그 공로로 선생님은 1998년 4월 보건의 날에 국민포장을 수여받았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근무 중 선생님이 발표한 우리 재래된장에서 발암성물질인 Aflatoxin의 오염이 우려된다는 연구결과 (1976)가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면서부터 선생님은 식품위생규제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그때 이후 식품의 오염과 안전성 연구에 초점을 두었고 국내산 현미 중 중금속의 오염 (1979), 서울시내 대중식사 중 수은의 오염실태 (1989), 캔 오렌지주스의 납 오염 및 유통기한 문제 (1995) 등의 연구발표가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야기되었다. 정년 후에도 중금속에 관한 연구 및 자문활동은 계속했으며 2004년부터 시작한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주관하는 중금속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셨다. 쌀 중 카드뮴 오염 문제 등으로 중금속에 대한 이슈가 다시 대두되었을 때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는 쌀 중 카드뮴의 기준을 0.2 mg/kg으로 설정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농림수산부 (현재는 농림수산식품부)는 자체 검토회의를 열었고 그 회의에서 선생님은 쌀 중의 카드뮴 함량이 0.2 mg/kg을 초과하는 토지에서의 경작을 중단시킴으로써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 보상을 고려해볼 때 그 기준안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시기도 했다. 
<정년은퇴 후의 활동>
40여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만 65세가 되던 1997년 2월 28일자로 선생님은 정년을 맞아 은퇴를 했다. 하지만 식품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면서 선생님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곳이 많았고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식품과학회에 대한 봉사의 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회활동을 쉬지 않으셨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창립 (1994)부터 선생님은 정회원을 지내셨고 종신회원을 거쳐 원로회원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평소에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역할에 큰 희망을 가지고 계셨다. 미국의 경우 National Academy Science가 과학적 진보 및 과학정책에 획을 긋는 중요한 보고서를 내는데, 새로 출범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그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고 필자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업무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2007년 11월 16일자로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공한한 바를 인정받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을 수여받았다. 선생님이 수상소식을 접했을 때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는데 그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학자로서 올곧게 살아온 선생님에게는 학자로서는 최고로 영예로운 그 상이 마치 사회가 세상을 떠나시는 선생님께 그 동안의 업적과 노고를 치하하며 수여하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시상식에는 선생님 대신 가족이 참석했었고 선생님은 정확히 한 달 후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은 정년 후 값진 책 한 권을 더 출간했다. 1999년 12월에 출판된 『식품안전성 논쟁사례』가 그것이다. 이 책은 국내에서 일어났던 식품의 위해성과 관련된 논쟁의 이모저모를 사실에 입각하여 매우 상세하게 기록함과 동시에 논쟁에 대한 당신의 과학적 판단을 제시하고 있다. 선생님이 안전성 논쟁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얻은 것들을 이 책을 집필하는 데 십분 활용하셨던 것 같다. 필자는 이 책을 대할 때마다 학자가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을 어떻게 환원해야 하는 것인지를 새삼 배우게 된다. 그 이외에도 『식품학, 영양학을 위한 생화학』 개정판을 1999년 5월에 출간했고 『농업생물화학』개정판을 1999년 7월에 출간하셨다. 그러는 중에도 선생님은 1993년에 출간된 『식품의 안전성 연구』의 개정판의 출간을 위해 자료를 계속 모으고 정리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석학, 과학기술을 말하다』시리즈 6으로 자유아카데미 출판사에서 2008년 10월 30일에 발행한 『식품안전성』책은『식품의 안전성 연구』의 15년 만의 개정판으로 볼 수 있다.
은퇴 후 선생님은 스스로 계획한 3년 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여러 단체에서 요청하는 학술 강연은 계속 응해서 정년 후에도 31건의 강연을 하셨다. 선생님은 평소 이러한 일을 후학을 위해 사회에 봉사해야 하는 학자, 교수가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생각하셨다. 한편 선생님께 의뢰하는 연구과제가 끊이지 않았으며 많은 것들이 주로 보건복지부 또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와 관련되는 정책과제였다. 선생님께서 1997년부터 2007년까지 관여했던 연구과제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보건복지부-고유과실류로부터 식이섬유와 bioflavonoids 신소재의 개발 및 기능성평가 (3차년도, 1998); (주)풀무원-농약의 휘산현상과 그 검증을 위한 연구 (1997); 보건의료기술평가-원료성 식품의 농약잔류기준 검토 및 검사순위 조정 (1999); 식품의약품안전청-UNDP Project ROK/97/002, 한국인을 위한 식품소비 데이터의 최적화 (1999); 보건복지부-식품중 농약 및 중금속의 총노출량 평가 및 관리방안 제시 (2000-2002); 식품의약품안전청-한국인의 평균식단중 중금속 섭취량의 위해도 평가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식품중 농약잔류기준 체계개선연구 (2004); 식품의약품안전청-식품첨가물공전 개선을 위한 연구 (2004); 식품의약품안전청-잔류농약 재평가사업 (2005); 식품의약품안전청-농산물중 중금속 노출위해성 및 기준규격 평가방법 조사 (2005); 식품의약품안전청-잔류농약 평가시스템 구축 (2006); 식품의약품안전청-식품중 기준미설정 위해물질 탐색 및 DB화 사업 (2006); 한나라당-식품안전관리 정책연구 (2006); 식품의약품안전청-국내 기준미설정 위해물질의 DB화 사업 및 권장규격 제안 연구 (2007).
선생님께서 즐거움과 보람으로 노후생활을 보냈던 시기는 아마도 1999년 9월 1일부터 2년 4개월 동안 대덕연구단지 안에서 지내시던 때였던 것 같다. 한국화학연구소의 김용화 박사님의 요청으로 비상근 책임연구원을 지내셨을 때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산책하며 젊은 과학자와 담소를 나누는 일은 큰 기쁨이며, 일을 차분하게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더없이 좋다고 하셨다.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선생님이 참여했던 일은 SIDS (Screening Information Data Set) 사업으로 한국이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1999년부터 참여한 사업이었다. 선생님은 평소에 규제 독성학 (Regulatory Toxicology)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화학연구소의 일을 하시면서 본인의 지식을 견고히 해나가셨다. 선생님은 화학연구소 일을 마치면서 유독물질의 위해성평가란 많은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 시험방법을 이해하면서 그 결과를 판독한 다음 위험성 또는 안전성을 가늠하는 절차로서 막연한 것들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과학적 곡예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셨다.
기술 및 연구자문 활동도 선생님 노후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1997년 3월 1일부터 3년간 한국식품공업협회에서 주관하는 특수영양식품 광고사전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보건복지부 식품위생심의위원의 일은 정년 후에도 계속 되었고 1998년 1월 1일부터는 심의위원장을 맡아 2002년 4월 30일까지 봉사하셨다. 탁월한 과학적 식견과 전문성으로 회의를 주도하셨음에 틀림없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정책업무에 특히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던 분야가 잔류농약이었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식품의약품안전청 잔류농약전문가협의회 위원으로서 농약기준이 합리적으로 설정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내의 농약관리가 선진국 수준에 비해 상당히 뒤쳐져 있고 코덱스와 같은 국제기구에 제출할 수 있는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기셨고 그래서 농약기준 설정에서의 선진화를 위해 많이 노력하셨다. 잔류농약전문가협의회에서의 활동은 물론이고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용역연구과제를 수행했으며 2005년 4월 18일부터 23일까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한 37번째 코덱스 농약잔류분과위원회 (Codex Committee on Pesticide Residues)에 참석하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타계하기 전 몇 년 동안의 황금 같은 시간을 잔류농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다.
선생님의 마지막 국외 출장은 일본 고베에서 2006년 8월 6일부터 8월 11일까지 개최되었던 11번째 IUPAC International Congress of Pesticide Residue Chemistry에의 참석이었다. 필자도 동행했었는데 거의 모든 session에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참석했던 선생님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벌써 선생님의 건강과 체력이 현저히 나빠졌을 때인데도 그랬던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연해진다. 잊혀 지지 않은 것은 선생님은 역시 학자로서 비전을 가지신 분이셨다. 학술회의가 끝난 후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농약은 농작물 개별적으로 농약기준을 설정할 것이 아니라 농작물 그룹별로 기준을 설정해야 될 것 같다고. 선생님은 당시 crop group tolerance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견 (智見)과 통찰력으로 잔류농약의 규제방향을 간파하신 것이다.
국내의 미흡한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겠다는 일념으로 선생님이 반드시 매듭짓고자 했던 일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인의 평균체중을 정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여러 기관의 관련책임자를 방문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끌어 모아 잠정적으로 한국인의 평균체중을 55 kg으로 제안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식품과학과 산업 32권 4호 (1999)에 ‘한국인의 평균체중에 대한 자료’로써 발표했다. 그 후 잔류농약 기준설정을 위해 활용되었다. 한국인의 평균체중에 대해 연구자마다 다른 수치, 하물며 같은 기관 내에서도 부서마다 다른 수치를 사용해서 위해성을 평가하고 이에 근거해 법적기준을 설정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과학적 후진성에 대한 불감증에 대해 한탄하셨다. 선생님이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또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식품섭취량 데이터이다. 얼핏 보기에는 국내 식품섭취량 데이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식품의 안전성 확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라 할 수 있는 식품섭취량 데이터에 많은 문제가 있었고 제대로 된 기초자료 없이는 식품안전 규제를 올바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선생님과 필자의 지론이었다. 선생님과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문제를 언급했고 드디어 제대로 된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고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년퇴임과 함께 그 동안 활동해오던 여러 학회 활동의 일선에서 떠나셨지만 한국식품과학회를 위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30년사 편집위원장을 맡으셨고 수상자선정위원회위원으로 일하셨으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용어사전편찬위원장을 맡아 식품과학용어사전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 사전은 식품과학과 학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더욱 두드러진 업적으로는 2000년부터 한국식품과학회 국문지, 영문지 (FSB; Food Science & Biotechnology)의 편집위원장과 영문지의 SCI 등재 추진위원장 직을 맡았다. 그리고 타계하실 때까지 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쏟아 붓는 듯한 열정을 가지고 전력을 다하셨다. 마침내 2003년도에 영문지가 SCI(E) 국제학술지로 등재되는 보람을 얻을 수 있었다. 학회에서는 SCI 등재 추진위원장으로서 학회를 돌보는 수고에 보답하고자 소정의 수고료를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학회에 절대적인 봉사차원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수고료를 반납하실 계획을 필자에게 밝히신 적이 있다. 그리고 한국식품과학회에 상을 만들어 계속해서 학회지의 수준이 향상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유지를 필자에게 남기셨다. 필자는 선생님의 유지를 유가족에게 알렸고 한국식품과학회에 『황파 FSB 진흥상』(제정 2008. 2)이 제정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2008년도에 황파 FSB 진흥상 1호의 영광을 윤석후 박사 (한국식품연구원)가 차지했다.
정년 후의 기간 동안 저서 4편, 분담집필서 3편, 연구논문 16편, 해설, 총설, 기술보고서 41 편, 합계 64편의 연구업적을 남기셨고 연구논문을 내용별로 분류하면 환경독성 연구 2편, 식품의 구성성분 및 품질특성 5편, 식품 중의 잔류농약에 관한 연구 8편, 식품 중의 중금속에 관한 연구 1편이 된다.
지난 2008년 5월,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동창회에서는 창립60주년을 맞아 농학교육 100년을 빛낸 영광의 얼굴들을 발굴하여 102명의 농학자를 상록인명예의 전당에 헌정하였다. 선생님은 이 명예의 전당에 헌정자로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본인의 공적서 초안을 준비하셨다. 서울대학교에서의 학창시절, 미국에서의 유학생활, 서울대학교 교수시절, 그리고 원자력연구소와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치면서 겪었던 그 수많은 인생역정을 회상하고 큰 감회에 젖었으리라 짐작한다.
학자의 본분을 몸소 실천한 분
선생님이 학자로서 후학들이 마땅히 본 받아야 할 모범적인 분이었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 같다. 학자의 본분은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앎을 최선의 방법으로 최대한 사회에 환원하는 것임을 선생님을 통해서 몸소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은 정년퇴임을 기념하며 출간한 책 (식품연구자료집, 1997)에서 “나는 학자, 교수 이상의 아무것도 되기를 원하지 않은 것 같다. 학문은 내 고향이었고 내 인생의 전부였다. 학문은 내 사랑이요 나의 직업이었다.” 또 “마차를 끄는 말 모양 외골수로 달리기만 했던 나의 인생, 이웃을 돌보거나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저 시간에만 쫓기어 연구와 학문에만 몰두하던 나의 생활이었다. 휴식을 무슨 죄악인 듯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쉴 틈이 생기면 일부러 바쁜 일정을 만들어가며 일에 묻히곤 했던 나의 반생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선생님은 학문적 선구자였다.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하고 다져서 후학들에게 물려주는 일을 평생 동안 하셨다. 생화학에서 식품과학, 환경보전이라는 전공의 기반을 구축했고 특히 식품분석, 환경오염, 위해평가와 같은 식품안전성 분야에서 태두로서의 역할을 다 하셨다. 평소에 말씀하시길 새로운 학문분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분야를 개척해서 후학에게 물려주는 일은 참으로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학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셨다. 한국의 정서와는 많이 다르게 선생님은 직장을 세 번, 서울대학교에서 원자력연구소로 그리고 다시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기셨다.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영예의 자리를 박차고 연구에만 매진해야 하는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동기는 그 무엇보다도 학문탐구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정년 후에도 11년 동안이나 열정적인 학문 활동을 계속했다.
선생님의 강의는 명강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 시절의 강의도 인상적이었다고 많은 후배와 제자들이 회상하곤 하는 것을 전해들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의 강의는 그 동안의 연구경험과 사회활동으로 인해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과학전문용어를 모두 영어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잘못됨을 깨닫고 한글로 바꾸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중요한 학술용어가 나오면 한글로 먼저 적고 그리고 괄호 안에 영어 또는 한자로 표기해주시곤 했다. 어떤 용어의 정의를 명확히 이해하게 되면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의 이해가 매우 수월해진다. 이렇게 선생님은 어려운 내용을 매우 쉽게 만들어 전달하는 강의를 해주셨다. 필자는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을 무척 좋아했고 선생님의 핵심과목인 식품화학에서 A+ 성적을 받았었다. 그것은 나의 자랑스러운 기억이었고 또한 선생님에게서 석사과정 지도를 받게 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선생님의 강의는 언제나 열정적이었다. 한 번도 강의를 대충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도 이제 대학 강단에 선 교수이다. 나의 강의는 선생님의 강의 스타일을 그대로 닮아 있다. 한 대학 후배는 세미나 강연에서의 모습이 선생님과 내가 매우 흡사하다고 한 적이 있다. 아마도 틀림없는 말일 것이다. 난 과학자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선생님을 진정으로 닮고 싶어 했다.
선생님에게서는 가벼움이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지식 하나 하나, 다른 사람의 생각 하나, 하나, 어는 것이건 진지하게 숙고 또 숙고 하셨다. 그래서 인지 선생님의 지인들은 주도면밀한 분, 용의주도한 분이어서 이론의 전개가 빈틈이 없다고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런 진지함과 더불어 학문적인 측면에서 과학적 지식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비판하시는 분이었다. 이런 까닭에 선생님을 어려워해 하고 불편해하는 분도 꽤 있었다. 대충 너머 가지 않는 분,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지 않는 분이셨다. 오랫동안 선생님을 지켜보면서 학자의 길이란 스스로 자신을 세워가는 길, 외로움과 함께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마음과 생각이 열려있는 분이셨다. 그리고 겸손하신 분이셨다. 타인의 생각에 대해 감명을 받고 그것을 새기는 분이셨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는 분 이셨다. 선생님과의 학문적 논쟁은 특히 매우 즐거운 일이었는데 선생님과의 논쟁에서 필자가 완벽하게 승리한 일이 박사과정 초반 당시 딱 한번 있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논문으로 발표한 유기염소계 농약의 위해성 평가방법에 논리적 모순이 있음을  필자가 지적한 일이었다. 한참 동안 의견을 나눈 후 선생님은 오류를 바로 인정했었다. 한 참 세월이 흐른 후 그때의 일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었다. 제자와의 논쟁에서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는 선생님이었기에 선생님을 일생의 존경하는 은사로, 닮고 싶은 은사로 필자는 기억하는 것이다.
선생님에게서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학자로서 또는 전문인으로서의 사회적 중요성이 덜하다는 식의 남성우월주의적 생각을 엿볼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아마도 선생님을 따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학생으로 배우는 동안 그리고 사회에 진출해서 대학교수로서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선생님은 늘 내게 새로운 도전을 권유해주셨고 과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가야할 정도를 안내해주셨다.
선생님의 성격이 매사에 정확하고 꼼꼼한 분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매우 힘들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위의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셨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었고 타인을 배려하는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선생님이 지도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되었고 의문점이 생기거나 이견이 있으면 불편함 없이 의논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 받은 첫 인간적 감명은 필자가 석사과정에 있을 때인데 선생님은 어린 학생과의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셨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생기는 경우도 많았을 테지만 학생들과의 약속 시간을 어김없이 지키셨다. 그 시절 이 분은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이로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자신의 은사 화산 (華山) 김호식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이 남다르셨다. 선생님께 학문적 동기를 부여하고 학자로서 선배로서 선생님을 인도해준 은사님이 바로 김호식 선생님이라고 평소에 말씀하시곤 했다. 1951년 8월부터 김호식 선생님이 돌아가시던 1968년 12월까지 18년 동안 김호식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한국농학 거성의 발자취』에 보면 선생님이 기록한 김호식 선생님에 대한 회고문이 들어 있다. 여기에서 보면 김호식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 강의실에서의 모습, 연구에 대한 열정, 학계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객관적 자료를 제시하며 애정을 가지고 기술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선생님은 이 원고를 작성하시며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더 자세한 내용을 기록할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고 내게 토로하신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김호식 선생님의 공동연구자로서는 이춘영 박사님 다음으로 가장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했었다. 선생님은 김호식 선생님이 가장 의지했고 믿었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화농 조백현 선생님, 화산 김호식 선생님의 뒤를 이어 황파 이서래 선생님이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학자로서의 도리,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셨다. 세상의 많은 논리와 타협하며 좀 더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경계하고 멀리하셨다. 불합리에 평생 맞서며 사셨던 것 같다. 매사를 정석으로 해결하고자 하셨고 그로인한 많은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 선생님은 교수란 학문적 성취를 달성해내고 그것들을 논문으로 발표해서 후세에 활용되어 질 수 있도록 하며 후학들을 열심히 교육시키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위 사람들과의 인간적 개인적 관계에 대해 소홀하셨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많은 압박들에 선생님이 힘드셨다고 한다. 선생님은 강인하고 굳건한 분이었다. 평소의 생활태도에서 흐트러짐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선생님은 몇 차례 건강상의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에 연구교수로 다녀온 후 1991년에 대수술을 받았다.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그때 담낭 암으로 진단받았고 위의 상당부분과 담낭을 떼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수술한 한 학기를 요양하고 그 다음 학기부터 강의를 하셨는데 선생님의 일하는 열정은 여전하셨다. 분명 예전에 비해 체력이 저하되었음이 분명한데 활발한 학문 활동을 보여주셨다. 선생님이 암 때문에 수술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평소처럼 강의하고 연구에 쉼이 없으셨다.
2007년 11월 14일 오후에 선생님은 댁 근처의 원자력병원에 입원하셨다. 2007년 봄부터 허리 통증으로 고통을 받고 계셨는데 통증이 악화되어 원자력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러 입원하신 것이다. 검사결과 신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셨던 것 같다. 필자는 선생님이 입원하시는 날 오전까지 차의 우려낸 물을 tea exudate로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었다. 돌이켜보면 일 년 동안 허리 통증을 어떻게 이겨내셨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지적인 작업을 어떻게 그렇게 해내실 수 있었는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선생님은 원자력병원에서 용산에 위치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옮기셨다가 다시 동작구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오셔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타계하시기 2주 전 즈음 찾아가 만나 뵈었을 때 선생님은 진통제로 간신히 고통을 다스리고 있으셨다. 그때 선생님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번 병원에서와는 사뭇 다른 진단을 받았는데 여러 가지로 판단해 볼 때 회생하기 어려운 것 같다”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에게 있는 힘을 다해 굳건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을 필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식품안전성 분야는 식품제조업자, 소비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또 이들 사이에서 규제당국의 정책결정이 사회에 큰 파장을 미치는데다 과학적 지식의 축적이 미약하고 행정자의 숙련도가 발휘되지 못할 때는 국민의 보건이 위협받게 되고 경제적 손실이 커지며 국제적 교역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선생님은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분야에서 날카로운 전문적 균형 감각과 비판적 의식을 토대로 한국의 식품안전성 분야를 선진 국가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하셨다.  선생님은 학자로서의 삶을 택했고 학자가 가야할 길을 걸으셨다.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셨다.
선생님은 분명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이셨다. 그러나 불의에 접하면 그것에 맞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아니 타협하지 못하는 분이셨다. 불합리, 오류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들이 시정되어 이 분야가 올바르게 나아갈 갈 수 있도록 학자로서의 길을 굳건히 지키셨다. 모든 곤란을 감내해야만 하는 어려운 길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선후배를 대함에 있어서나 제자를 대함에 있어 그리고 동료를 대함에 있어 선생님은 높은 인격으로 처신하신 분이셨다. 황파 이서래 선생님이야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던 분이다. 매사에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흔들림 없이 가야 할 길을 가는 강인함이라고나 할까. 이 점은 학자가 가져야 할 근본이 되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자신을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행운아라고 말했다. 그러나 평생 졸업 앨범사진 하나 가질 수 없었던 역사의 격동기 속을 헤쳐 살아온 그 분에게 행운아였다고 우리 현 세대가 말할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 황파 선생님의 고난스러웠던 학창 시절과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생각하면 머리가 숙연해진다. 필자는 선생님과 학문적 견해를 같이 하고 선생님이 가시는 어려운 길을 걷는데 기꺼이 동참했다. 이제 남은 일은 선생님이 이룩한 학문과 그 뜻을 이어받아 소원하셨던 대로 식품안전성 분야가 잘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 일은 학자의 길을 걷는 필자가 은사로부터 받은 은혜이며 또 맡겨진 임무이기도 하다. 일생을 살아가며 존경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고 또 그 뜻을 이어받아 행하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알고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멋지고 값진 일인지를 생각하면 필자야말로 진정 행운아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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