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회원

  • HOME
  • 회원
  • 회상록

[의약학부] 故 김진복 교수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0-08-07
Hit |
9280
집필자: 양한광 서울대학교 교수


 김진복 박사님께서 작고하시고 난후 저동 백병원의 연구실을 정리하러 들렀을 때, 작고 당시 72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 없이 쌓여있는 의학전문 원서들과 논문, 그리고 연구실의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표창장들은 지난 시절 필자가 의과대학생, 외과 전공의시절, 박사시절 계속 뵈어왔던 연구실과 수술실에서의 그분의 모습을 떠 올리기에 충분하였다. 김 박사님께서는 평소 메모를 잘하시고 기록을 잘 정리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김 박사님은 위암분야의 세계적인 학자로, 생전에 환자의 진료는 물론 위암치료의 연구 및 개발, 후학 양성 등 의학자로서의 본분에 진력하셨다. 뿐만 아니라 대한암협회를 통해 국민 암 계몽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하셨고, 암 연구 고취를 위한 대한암연구재단 설립과 사회봉사를 위한 로타리 활동 및 기부 등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셨다.

 세계적인 위암분야의 학자답게 위암 치료와 연구 등에 관한 김 박사님의 연구업적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으니, 본 회상록에서는 주로 곁에서 뵈면서 알게 된 김 박사님의 인간적인 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 박사님은 1933년 충북 괴산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셨다. 조부께서는 충북향교의 교리를 지내셨고, 집에서 충주시까지는 거리로는 30리 정도 되지만 큰 산을 넘어야 했다. 김 박사님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은 일생동안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의 ‘적선’이었는데, 장남이었던 김 박사님은 다른 형제보다 가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집안은 전통적으로 조상숭배를 가장 큰 삶의 목표로 매년 기제사를 5대조까지 지내고, 거기에다 고교시절까지는 매월 산소에 성묘를 해야만 했다. 조상숭배를 생활의 의의로 알고 계신 김 박사님께서는 이 때문에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셨다고 했다. 그런 그분이 세상을 뜨기 전 중환자실에서 하나님의 신앙을 받아드리게 된 것은 엄청난 마음의 변화였다.


  김 박사님의 고향은 아름다운 산이 있고, 그 산 밑에 냇물이 흘러 여름철에는 미역을 감으며 반두로 메기와 피라미 같은 물고기를 잡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전통적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 박사님은 불과 5세 전에 한문 천자편을 줄줄 외어 여러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5세 때 장연당 (長延堂) 한약국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충북 제천읍으로 이사하신 후 제천 소화국민학교에 입학하셨는데, 이 학교는 해방 이후 동명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김 박사님께서는 이후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해방이후의 사회적 혼란을 염려한 부모님의 권유로 고향인 충주 중․고등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것을 아쉬워하셨다.
     
 회고록을 보면 김 박사님께서는 6・25사변이 발발하여 피난길에 오르게 되는데, 충북 괴산을 거쳐 걸어서 대구까지 내려가 다시 기차지붕 위에 매달려 부산까지 피난하셨다고 한다. 이후 국방부 정훈국 소속의 학도의용대에 입대하여 정훈업무를 보다 전세가 호전되자 다시 충주고등학교에 복교하셨는데, 1952년 충주고등학교 졸업식 당시 전교우수생으로 최우수상과 충북도지사상을 받고,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차석으로 입학하셨다.


 대학시절 김 박사님께서는 충주중학교 은사이셨던 안동준 선생이 설립한 중산학사 (中山學舍)의 사감으로 생활했는데, 중산학사는 충북 괴산, 충주, 음성군 재경대학생들의 합숙소로, 김 박사님께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중산은 국회의원 안동준 선생의 아호이다. 


 박사님께서는 의대 4학년 시절, 새롭게 지도박사 제도가 생기면서 외과박사였던 전성관 박사님의 지도학생이 되었다. 전성관 박사님께서는 김 박사님에게 임상경험도 쌓고 박사실 (대한의원건물의 현 의학박물관)에서 공부도 하게 하셨다. 또한 당시 전 박사님께서는 해방 후 처음으로 대한외과학회의 숙제보고를 위탁받아 의대 4학년이던 김 박사님께 서울대학병원 외과 수술 위암환자의 임상통계와 분석을 맡겼는데, 김 박사님은 이 때문에 학생신분으로 방과 후 조용한 교실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매우 영광스럽고 고맙게 기억하셨다. 김 박사님은 “자네는 위암수술을 제일 잘 하고 많이 하는 의사가 되라”고 하신 전 박사님의 격려 말씀 때문에 외과를 전공하기로 결심하셨는데, 이후 대학원에 외과전공으로 입학함으로써 줄곧 외과의사로서 한 길만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회고하셨다. 김 박사님께서는 당시 서울대학교 졸업생 중에서는 전체 1등을 하여 서울대학교 총장상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1966년 4월 1일, 외과 전임강사로 서울대학교병원에 돌아온 김 박사님은 박사로서 교육과 진료에 쉴 틈 없이 매진하셨고, 거기에다 의국장일까지 맡아 교실살림을 꾸려나가는 등 “당시의 분주한 학교생활이 매우 힘들었다”고 회고하기도 하셨다. 이 당시 김 박사님께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공비의 청와대 기습을 탐지하고 긴급방위를 하던 종로경찰서 정조수 형사의 복부 다발성 (소장 12군데와 맹장부위) 총상수술을 밤새 진행하던 일을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로 회고하기도 하셨다. 


 1969년, 일본정부는 해외원조의 일환으로 제1회 국제조기위암연구회를 통해 같은 해 2월 하순부터 2개월간 동경 시내 유명 5개 병원에서 위내시경 및 수술연구를 시행했는데, 이때 김 박사님께서는 일본암연구회병원의 외과과장 니시 미쓰마사 (西滿正) 박사와 일본 위암수술의 일인자였던 가지다니 (梶谷) 박사의 지도를 받았다. 니시 박사는 후에 가고시마대학 외과 주임박사와 암연구회 병원장, 명예원장을 거쳐 일본위암연구회 (후에 학회로 발전) 회장을 역임하셨고, 김 박사님과 함께 1995년 국제위암학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 (95~97)을 맡았으며 김 박사님은 후에 3대 회장(98-2001)을 맡아 각각 제 1회 및 제 3회 국제위암학회 국제대회를 성대히 치른바 있다.

 1969년 7월, 김 박사님께서는 CMB (China Medical Board) 장학생으로 미국 보스턴의대 외과에 1년간 유학하게 되어 윌리엄즈 (Williams) 박사와 번 (Byrne) 박사의 지도로 위장외과학 연구를 하셨고, 윌리엄즈 박사의 공저서인 ‘Vascular Disorders of the Intestine’에 한 챕터를 발표하기도 하셨다. 


 1970년 7월부터 이듬해인 1971년 8월까지 13개월간은 하버드의대 외과연구실과 브리감 병원 외과에서 윌슨 (Wilson) 박사 지도하에 외과종양학을, 또 당대 세계 제일의 석학이셨던 모어 (Moore) 박사와 노벨상 수상자인 머리 (Murray) 박사 지도하에 장기이식학을 연구하셨다. 2년 1개월간의 보스턴 유학 시절 당시, 김 박사님의 미국 면허증 번호 (Massachusetts 033445868-05-05-74), 중고차 번호(차량번호 Massachusetts 191․80F) 등도 메모로 남아 있어 얼마나 기록에 철저하였는지 볼 수 있는 한 일화이기도 하다.


 또한, 1987년 7월 방한 중이던 콜롬비아 바르코 대통령이 김 박사님께 응급 수술을 받고 잘 회복하게 되었는데, 이 일로 김 박사님은 콜롬비아 국가훈장을 받았으며 우리나라의 명예와 서울대병원의 능력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김 박사님의 학력, 경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학력․경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4년 수석 졸업(58.3) 의학사 수여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부 외과전공수료 의학석사(62.2) 및 의학박사 수여(66.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래박사(63-66), 전임강사(66-68), 조박사(68-72) 
부박사(72-78), 박사(78-98)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임박사(78-88), 서울대학교병원 일반외과 과장(78-88)
미국 트리플러 육군병원(59-61) 월터리드 육군병원(62) 수련
일본 동경암연구회병원과 순천당대학병원에서 3개월 조기위암(69)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WHO 외과세미나 2개월 연수(69)
미국, 보스톤의대와 하바드의대 외과학 연수(69-71)
미국 뉴욕 스롱케타링 암센터 1개월 연수(76)
뉴욕주립의대, 보스톤의대 및 내쉬빌, 밴더빌트대학 등 초청박사
대한암협회 이사(72-89) 이사장(89-95) 부회장(95-97) 회장(97-03.6)        
대한암학회 학술부장(71-83) 이사장(83-89) 회장(89-95)
대한외과학회 이사(72-81) 이사장(82-84) 회장(91-92)
대한위암학회 회장(96-01),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이사(80-99) 부회장(98-05)
亞․태암학회 회장(85-87) 재정위원장(90-96) 사무총장(96-01) 명예회장(01-現)
국제로타리 3640지구 총재(2000-01) 
국제위암학회 제3회 학술대회장(97-99) 회장(99-01), 국제소화기학회 세계대회장(96)
국제암협회(UICC) 암치료위원장(98-02), 미국외과학회 (ASA) 명예회원(90.4) 한국최초
미국외과학술원 정회원(80.10) 및 명예회원(93.10) 한국최초, 콜럼비아외과학회 명예회원(88)
국제외과학회, 국제소화기외과학회, 국제암학회, 아․태암학회, 일본암학회 및 
아세아임상종양학회 등 정회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00-05)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박사, 인제대학교 서울백중앙의료원 명예의료원장 
한국위암센터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박사, 북경의과대학 명예박사
국제위암학회 명예회장, 아․태암학회 명예회장, 아세아임상종양학회 회장
대한위암학회 명예회장, 대한암연구재단 이사장(89-2005)
아세아외과학회 이사, 미국외과학술원 가버너
국제외과학술지(WJS), 미국암학회지(Cancer), 미국외과학회지(AOS), 영국외과학술지(BJS) 및 국제외과종양학회지(SO) 등 15개 유명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 


 

 김 박사님께는 특히 우리나라 의학의 국제화를 위한 노력하였다. 여기 신문에 개제된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한국의학의 국제화 노력도 개혁의 하나  - 1993년 9월 20일 의협신보


 ▲ 한국의학의 국제화 현황과 대책


 최근 수년간 한국의학의 국제화를 한국의학술 지위의 향상뿐만 아니라 한국을 옳게 알리는 국민적 외교차원에서도 절대 필요하다고 다 같이 느끼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국제학회 참석률이 아주 저조하다. 그 원인으로는 아직 국제학회에서 인정, 발표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연구결과가 적다는 점과 경비가 과중하다는 두가지 이유가 클 것이다. 최근 93년 8월 22일부터 27일까지 홍콩에서 개최된 제 35회 국제외과학회 학술대회는 「1993년 국제외과학술대회 주간」이란 큰 간판아래 모체인 국제외과학회(ISS/SIC)를 비롯하여 국제성형외과, 외상외과, 내분비외과, 소화기외과 및 심혈관외과학회 등 16개 외과분야 학자들이 공동 참여하는 학술적 수준이 제일 높은 거대 학회이다. 78개국에서 2500명의 외과의사와 기타 가족 및 전시자, 사무국 요원까지 합하면 35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학술대회 개최 전까지 선 등록한 통계를 보면 일본이 413명, 미국 198명이고 한국인은 단 14명으로 동양권에서도 홍콩은 전외과의사(185명)가 참석했고 일본이 413명은 제외하더라도 우리나라보다 경제력이 훨씬 모자라는 필리핀 100명, 대만 45명, 중국(본토) 97명이나 참석하여, 일본 다음으로 아시아의 제 2경제대국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인으로서는 좀 창피하였고 이를 반드시 우리 동료 외과의사에게 알려 분발해야겠다고 느꼈다. 

 

 김진복 박사님의 국제학술무대에서의 대표적 위상

1987년 8차 아태암학회 개최 조직위원장
1996년  국제소화기외과학회(CICD) 제15차 세계대회장 
1993년 미국외과학술원 명예회원 추대 (Honorary Fellow of American College of Surgery):


 김 박사님께서는 한국 외과의사로는 처음으로 미국외과학술원 (American College of Surgeon) 명예회원에 추대되셨다. 이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받는 영광이며 아시아 전지역을 통틀어 약간 명의 회원만 추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과를 비롯한 외과계의 전세계 의사 가운데 외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큰 총 90명에게만 수여하는 미국 외과학술원 명예회원은 외과의사에게는 최고의 영예로 알려져 있으며, 90명 명예회원 중에 결원이 생기면 매년 1~2명씩 전체이사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을 통해 신임회원을 뽑는다. 김 박사님은 당시 총 4백 73편의 외과학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이 가운데 58편이 유명 국제학술지에 발표되는 실적으로 기록했으며, 특히 최근 미국외과학회지와 외과종양학회지에 게재된 2편의 위암연구논문을 비롯해 위암연구의 국제적 업적이 인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UICC 암치료프로그램위원장

 김 박사님께서는 1996년 UICC (국제항암연맹) 암치료프로그램의 위원장으로 선출돼 세계화시대에 걸맞게 우리나라 의학의 세계화를 선도하셨다. UICC에는 치료분야를 비롯해 예방․진단․분자생물학 등 9개 분야의 프로그램 (부서)이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일본인이 예방프로그램의 위원장을 맡았던 적이 있을 뿐, 치료위원장에 선출된 경우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는 김 박사님께서 최초셨다. 

제3회 국제위암학회 세계학술대회(International Gastric Cancer Congress) 대회장
1999년 4월 27-30일 서울 롯데호텔(소공동) 

 

 또한 김 박사님께서는 필생의 사업으로 국민 암계몽 활동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대한암협회 활동을 통한 대국민 암계몽사업


 

 대한암협회는 암퇴치 사업에 관심을 가진 의료계와 재계 등의 인사들이 주축이 돼 1966년 12월 6일 당시 보건사회부로부터 사단법인체로 인가를 받아 지금까지 대국민 암계몽 강연 등 암 퇴치사업을 펼치고 있다. 

 1971년도 대한암협회 초대 회장은 이병철 씨로 당시 매월 암협회 경상비로 50만원씩 지원하였다. 대한암협회는 대통령 부인 이희호 (李姬鎬) 여사 이후 역대 영부인들께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고 있다. 대한암협회는 서울에서 열린 ‘암계몽 강연회’를 전국 15개 도시를 순회하며 개최하고 있다. 김 박사님께서는 1971년 가을부터 대한암협회의 상임이사로 임명된 이래 이사 (1971~1989), 이사장 (1989~1995), 부회장 (1995~1997), 회장 (1997~2003)을 역임하면서 항암전선의 발전에 헌신적 봉사를 하셨다.


 당시 언론 인터뷰기사를 아래에 인용하였다.

 

- 1998년 11월 14일 국민일보, '암예방․초기대처…정부차원 나서야 '

 전 세계적으로 위암수술을 가장 많이 한 의사 김진복 (金鎭福․65) 박사가 최근 서울대병원을 정년퇴직, 인제의대 서울백병원에 새둥지를 틀고 한국위암센터를 차렸다. 요즘도 하루 2건씩 위암수술을 집도한다는 그에게 암을 정복하기 위해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어봤다. 

-언제쯤 암 정복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는가.
▲솔직히 암 정복이란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암 발생부위나 성질에 따라 50여종 이상이 보고 돼 있는데 ‘모든 암에 다 효과적인 항암제’ 개발은 사실상 어렵다. 암종류에 따라 선별적 처방이 필요하다. 따라서 암 정복이라는 말보다는 암의 억제(제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지금으로선 몇 년후쯤 모든 암퇴치가 가능할지 단언하기 힘들다.

-최근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연구중인 유전자요법이 결정적 단서가 될 것으로 생각하나.
▲그렇다. 여러 실험을 통해 암세포의 증식과 억제를 좌우하는 유전자, 또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유전자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유전자요법은 앞으로 암 정복의 획기적인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 시점에서 암을 효과적으로 이겨내는 방법은.
▲발암 초기에 발견, 그 싹을 일치감치 잘라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 정부차원의 암에 대한 국민 계몽사업을 하루 빨리 확대 강화시켜야 한다. 암에 걸린 다음 치료하는 비용보다는 암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암에 걸려을 땐 수술을 완벽하게 함으로써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줄 필요가 있다. 

-암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전해줄 메시지가 있다면
▲절대로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새로운 진전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다. 5~10년 후쯤이면 웬만한 암은 어느정도 퇴치가 가능해질 것으로 믿는다. 결국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로타리 활동을 통한 사회 봉사


 

 2000년, 인도주의 봉사활동을 이상으로 삼는 국제로타리 3640지구 (서울 한강 이남) 총재에 취임한 김 박사님은 취임포부로 “도움이 필요한 삶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로타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그동안 로타리는 돈 있는 사람들의 사교모임으로 잘못 비쳐지기도 하였는데, 앞으로는 로타리의 참모습을 국민들에게 올바르게 알리고 나아가 뜻있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로타리 활동에 동참하기를 희망한다. 특히 동료의사들의 많은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 박사님은 자기를 초월한 봉사에 최선을 다하며 훗날 자신에게 이로움이 돌아온다는 진리를 강조하며, 남에게 도움을 줄때 참다운 기쁨을 맛본다고 하셨다. 


북한 방문


 2001년 7월 2일부터 7일까지 김 박사님께서는 평양 조선의학회 부회장 정종지 박사 (사실상의 이북 보건행정 책임자)와 평양의학대학 유환수 부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의학대학을 방문하셨다. 국제로타리 3640지구가 주관한 이 방문에서는 국제로타리 본부, 일본 2810지구, 한국로타리 16개 지구 등의 기부로 구입한 약 1억3천 여 만원 상당의 수술도구를 통해 수술실을 설치해주었다. 특히 방북 기간 중 ‘위암의 치료 특히 면역화학수술요법’에 대한 특강과 함께 제 3기에 접어든 위암환자 수술을 (남자, 53세) 집도하였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당시까지 남한의사가 북한에 들어간 것은 수차례 있었지만 환자를 대상으로 직접 시술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2002년 1월 29일부터 2월 3일까지 김 박사님께서는 두 번째로 평양의학대학을 방문하였다. ‘사랑의 친구들’이라는 자선단체와 함께 한 2차 방문은 당시 대통령 영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미국 우표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로타리안 Kurt Weishaupt씨의 기부로 구입한 상당량의 의약품을 비롯해, 필자와 우동휘 총재가 같이 기부한 B형 간염백신 300명분을 전달하고 의학대학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강추위 속에 사리원 유치원까지 방문하는 강행군을 거듭한 김 박사님께서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찬 방바닥에 장시간 노출되어 심한 감기로 고생을 하기도 하셨으나, 후일 “자신의 작은 도움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봉사한 것 같아 큰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 박사님께서는 당시 북한 방문에서 얻은 감기가 심해져, 2002년도 2월부터 약 한달 여 간 심부전으로 서울대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잘 회복되어 같은 해 4월 6일에 개최된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세계적 위암진료 및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 


교육자로서의 자세;

 김 박사님께서는 교육자로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셨고, 이 후학들은 현재 전국의 유수 병원에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

아래 언론에 개재된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나 후배의사들에게 ‘생명은 하나’라는 사실과 외과수술은 1차로 성공해야 하므로 ‘완벽’을 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김진복 박사. ‘수술의 성공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완벽해야 한다’를 역설하기도 한다. 미국에 있을 때 머레이 박사로부터 그곳의 연구박사로 남아달라는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의직을 택할 때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고향의 가난과 질병’이 눈에 선해 한국행을 고집했다는 김진복 박사다. “외과수술의 완벽주의 는 피할 수 없는 과중한 스트레스를 동반, 일을 한다는 보람과 봉사정신이 굳세지 않으면 그 많은 수술의 스트레스를 감내하기란 힘든 작업이지요.” 30여년의 의직 생활동안 김 박사에게 선보인 많은 환자들 중에서도 위를 떼어 내고도 10년 20년을 사는 환자들을 만날 때면 반갑기도 하고, 어린이 환자들이 어엿한 성인이 돼서 김 박사를 찾아줄 때면 고맙기도 하다는 김 박사는 이들 환자들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최근 의료계가 맞고 있는 시련들을 생각하면 한편 불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좋은 치료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의료인들도 자성할 것은 해야지요.”  1990년 언론 인터뷰

 

1998년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8월말 정년퇴임, 교단을 떠난다. “인생이란 우주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하루하루가 대단히 귀하고 소중한 것이며 그 찰나의 순간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 하루하루를 나라와 사회를 위해 얼마나 값지게 봉사해 왔었는지 스스로 반성해 보게 됩니다.”

 33년을 서울의대에 재직해 온 김 박사는 그동안 국내는 물론 국제외과학회 등 국제적인 활동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박사로서 교육․연구․진료의 3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국내 및 국제 학술활동에 사명감을 갖고 우리나라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민간대사로서의 역할을 위한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세계적인 학술대회에서 미국t의무영국 등 선진국의 국기보다 더 큰 태극기를 걸어놓고 강연하는 등 나름대로 국위를 선양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뿌듯한 감회로 남습니다.”

 ”학문의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학문에 종사해 왔던 저의 생에 역시 희망과 용기,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절망과 좌절, 슬픔과 괴로움도 교차되는 생애였습니다. 좌우명이란 가장 평범한 것이지만 ‘성실과 근면’ 완벽한 소임수행이었습니다. “

 완벽주의 때문에 ‘준마가편(駿馬可便)’ ‘엄부출효자(嚴父出孝子)’라는 격언대로 제자들에게는 칭찬보다 늘 질책을 많이 해왔다며 고생했던 제자와 후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외과의사로서 완벽한 수술을 위해 어느 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많이 들려주던 교훈이 있는데 바로 ‘수술은 결코 큰 술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주 작고 세세한 술기에 의해 그 결과가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이듯이 그 생명을 담보로 하는 수술 역시 1백점짜리 수술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치열한 사명감을 후배의사들도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1998년 8월 27일 의협신문


 

 1998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한 후 인제대 백중앙의료원장 겸 한국위암센터 원장으로 그의 일생의 목표인 암퇴치사업, 후학양성을 계속하게 된다. 김 박사님께서는 7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위암환자 수술을 하였으며 자신의 임기를 마무리하는 2005년 8월 별세할 때까지 의료 및 의학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학회나 집담회 등에서 대가로서 경륜에서 나오는 지적 및 언급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셨다. 돌아가신 2005년 여름에는 해외여행을 하지 말라는 주치의사의 권유에도 일본에서 열린 국제위암학회에 참석하여 마지막 폐회식 및 총회까지 명예회장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신 모습에서 많은 후학들이 그 책임감을 존경하게 되었다. 김 박사님은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입원하게 되고 심부전으로 2005년 8월 별세하시게 된다. 생애를 최선을 다하여 살고 끝까지 현장에서 일하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향년 72세이셨다. 장례 중 대통령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조의를 표하였고 사회적 추모를 받으셨다. 


 여기 김 박사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단문들을 첨부하였다.

 

1999년 10월 15일 서울의대동창회보
추억의 창


 

포르말린 냄새에 눈물 쏟기 일쑤...옛 함춘원 동산 산책로 그리워


 

 그리운 함춘원 언덕의 숲속, 그 숲속에서 점심시간에 도시락도 먹고, 하늘을 보며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 2년간의 의예과 시절은 다른 인문․사회대학이나 자연계대학과 비슷하게 일반인이 생각하는 대학생활, 즉 비교적 시간적으로 여유 있게 공부할 수 있었던 대학생활이었다. 그러나 의과대학 본과로 진학하고 나서는 다시 고교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일주일 내내 꽉 짜여진 강의와 실습시간표에 따라 한눈 팔 사이 없이 열심히 공부에만 열중해야했다. 

 당시 교과서는 영문교과서 뿐이었다. 가격도 비싸서 다 사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지만 그것도 겨우 차례가 올 판이었다. 따라서 박사님들의 강의를 잘 기록해야만 했다. 급한 일로 부득이 강의를 못 들었을 경우에는 남의 노트를 빌려 베낄 수밖에 없었으나 이 또한 매우 힘들었다. 그만큼 모든 학생들은 열심히 강의를 들었고 포르말린 냄새로 눈물이 쏟아지는 해부학 실습을 하고 나면 골치가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다행히도 의과대학의 연건캠퍼스는 유적으로 남아있는 함춘문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얕은 동산에 푸른 숲이 있어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잔뜩 피어, 우리들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명 휴식처로 매일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주어 오후 수업 실습도 거뜬히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병원에서 의과대학 건물로 내려가는 길은 산책로로서도 훌륭했다. 그러나 그 뒤 신축병원 건설 때문에 함춘문 뒤의 동산이 없어지고 이어서 소아병원과 검진센터의 건설로 내가 즐겨 오르던 남쪽의 작은 동산의 숲도 없어졌으며, 그 후에는 주차장 건설로 인해 시계탑 뒤편 서편의 녹지대가 또 없어져 이제는 주위환경이 삭막하기까지 하다.

 병원의 신축 때문에 녹지대가 없어진 것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주차장 건설 당시 땅속으로 한층만 더 파고 지상에는 그대로 나무가 있는 녹지대를 조성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회복기 환자들이 앉아서 햇볕도 쪼이고 신선한 공기도 마시며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깊은 생각 없이 속성으로 경제재건을 위해 또는 수출증가를 위한 산업발달 등을 이유로 파괴된 자연환경을 복구하려면 그동안의 수입의 몇 배나 더 소요된다는 것을 왜 모를까? 지금부터라도 모든 일은 진실한 득실을 따져보고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된다고 믿는다.  


 

-----------------------------------------------------------------------------


 

2000년 1월 10일 서울의대동창회보 
협동하고 칭찬하는 문화를… 


 

 새천년과 21세기 그리고 경진년 새해인 200년 1월 1일 설날이 밝았다. 여느 때의 새해 아침에도 새해의 기쁨과 희망에 찬 신년 설계를 위하여 마음이 들뜨기 마련인데 이번 설은 2000년대의 새 밀레니엄과 21세기를 새로 여는 뜻있는 새해 아침이다. 우리 다 같이 정신을 가다듬고 지나간 20세기의 일들을 돌이켜보고 경건한 자세로 과오를 반성하고 다가오는 새천년에는 다시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먼저 일반적인 사항으로 가장 깨끗해야 할 정치를 비롯하여 경제, 사회, 교육 및 환경 등을 돌이켜볼 때 20세기에는 권력층의 정경유착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온갖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여 급기야는 모라토리엄 직전에 IMF 관리 하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지연, 학연 등으로 서로 반목하고 협조하지 못하여 발전진도를 느리게 하였다. 한편 온 분야에서 금권만능의 적당주의가 팽배하고 준법정신이 결여되었으며 산업경제발전과 수출증진을 위하여 환경을 마구 파괴하여 수출증진 돌이키기에는 얻은 것의 수 십 배의 돈이 들게 생겼다.

 교육정책도 갈팡질팡하는 동안 지나친 과외학습의 폐습으로 경제적 시간적 손실뿐만 아니라 국가장래를 떠맡아야 할 젊은이들이 지나친 과잉보호로 자기만 위하고 국가나 사회를 걱정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를 위해서는 부모도 살해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를 길러 국가사회를 위하여 남과 협력하고 봉사할 줄 아는 국민이 드물게 되었다. 

 건강의료정책도 선진국대열에 서려면 우선 의료일원화가 되어야 하는데도 아무 대책이 없고 의약분업만이 확고한 시행 기틀 없이 엉성하게 시행될 예정이어서 국민들이 많은 불신과 혼란마저 겪어야 할 것이 예상된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정의와 성실 책임완수, 준법정신이 통하는 모두에게 진실하고 공평하고 유익하여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는 서로 협동하고 존경하는 풍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에 대내적으로 우리 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몇 가지 생각해 보겠다. 우리에게는 서로 밀어 주고 끌어 주는 힘과 단결력이 부족하였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단결로 상부상조하여 대학교 의학계의 발전에 헌신하여야 한다. 또한 대학발전을 위하여 대학에서는 연구와 교육의 자유가 허락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리고 훌륭한 연구와 진료 업적을 올린 동료박사를 칭찬할 줄 알고 서로 도와주는 풍토가 새 세기에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 끝으로 모든 서울대인과 그 가족들에게 건강과 신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
  
끝으로 김 박사님께서는 사회기부에도 남다르셨다.  

김 박사님의 주요기부 내역을 보면 

  1.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1996년 위암연구기금 1억원 의학발전 기금 기부
  2. 대한암연구재단에 본인의 2000만원을 비롯하여 1989년 10억여원의 연구기금으로 재단법인 대한암연구재단을 설립하여 암연구 및 학술대회 지원
  3. 대한위암학회에 명예회장으로 2000년 1억원을 위암연구기금으로 기부함.
  4. 국제위암학회의 명예회장으로 “김진복 특별강의(Jin-Pok Kim lectureship)”기금으로 미화 30,000불 (3900만원)기부.
  5. 국제항암연맹(UICC)의 영구기금(Roll of honor)평생멤버로 미화 2,500불과 Murphy 장학기금 500불 기부.
  6. 국제로타리 재단에 2001년 현재 미화 총 27,000불을 기부하고 3640지구 회관건립기금 으로 7000만원을 기부함.
  7. 한국로타리 장학문화재단에 2000년 장학기금으로 4,000만원 기부.
  8. 국제로타리 3640지구 총재로 총 132,600,000원 상당의 수술장 의료장비 및 기구를 평 양의학대학병원에 2001년 7월에 기증
  9. 미국외과학술원(ACS)에 장학기금으로 미화 10,000불 기부. 미국외과학회(ASA)에 2,000불 기부.
 10. 2000~2001년에 불우이웃 돕기(500만원), 무의탁 암환자돕기(2,400만원), 백내 장환자 개안수술(1000만원) 등을 기부시술. 


 

 김 박사님을 요약하면 위암 치료 및 연구의 전문가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았던 분으로 강력한 리더십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책임감이 강하셨으며 우리나라 의학의 국제화에 크게 공헌하셨다. 뿐만 아니라 공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하셨던 분이었다. 

작성자 연락처



이전글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