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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부] 故 김정흠 박사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4-08-20
Hit |
8633


                                                                                                                                                  집필자: 심광숙 (고려대학교)




 필자는 1965년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여 1969년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이어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1971년 원자핵물리학 실험연구로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부와 대학원 재학 중에는 김정흠 교수님으로부터 물리학전공 핵심과목인 일반역학, 수리물리학 및 양자역학 과목 등을 가르침 받았다. 1971년부터 1974년 까지 육군사관학교 교수부 물리학과 교관요원(전임강사, 육군대위예편)으로 3년 동안 복무 하며 생도교육을 하였다. 그 후 예편 직후인 1974년 10월 프랑스정부장학생으로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유학하여 1978년 10월 원자핵물리 실험연구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9년 귀국하여 중앙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 조교수로 3년 반 동안 재직한 후 1982년부터 2011년 까지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해 왔다. 이에 따라 고려대학에 재직하게 된 1982년부터 김정흠 교수님께서 정년퇴임 하신 1992년 까지 10년 동안은 선생님을 직접 가까이서 모시며 스승님과 함께 교수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1991년부터 1999년 까지 일본 고에너지물리연구소(KEK)에서 교토대학교 원자핵물리 실험그룹과 하이퍼 핵에 관한 국제공동연구를 수행하였다. 1993년 2월부터 1년 동안 캐나다 국립 원자핵물리연구소인 TRIUMF에서 연구하였으며, 1995년부터 2011년 사이에는 미국 브룩헤븐국립연구소(BNL)의 상대론적 고에너지 중입자 충돌형가속기(RHIC)를 이용한 충돌실험을 PHENIX 국제공동연구 그룹에서 수행하였다. 아울러 1997년부터 2011년 사이에는 유럽연합의 고에너지물리연구소(CERN)에서 거대강입자 충돌형 가속기(LHC)를 이용하여 CMS 국제공동연구 그룹에서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에서 생성되는 우주탄생 초기의 빅뱅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상대론적 중이온 충돌실험을 수행하였다. 한편 1998년부터 2011년 까지 독일 다름쉬타트에 위치한 중이온 입자가속기연구소(GSI)의 FOPI그룹에서 중간에너지 중이온 충돌실험 연구를 수행하였다.

  1997-1999년에는 고려대학교 과학도서관 관장으로서 Web of Science등 전자저널 구입을 시작으로 디지털 라이브러리 구축에 기틀을 세웠다. 2000-2002년에는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서울분소장을 역임한 후 2002-2004년에는 고려대학교 이과대학장으로 재직하였다. 2005-2006년에는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2007-2008년에는 고려대학교 교무부총장을 역임한 바 있다. 2011년 8월31일 자로 정년퇴임하여 현재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선구적 물리학자 정호(靜湖) 김정흠(金貞欽) 교수님을 기리며

                                                       1927. 4. 20 – 2005. 10. 2

- 사회적 배경-

 정호(靜湖) 김정흠(金貞欽) 교수는 나라를 빼앗기고 국제정세 또한 불안정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인 父 김시형(金時馨) 님과 母 박춘자(朴春子) 님의 3남으로 1927년 4월 20일 한반도 북서 쪽 끝단에 위치한 평안북도 용천군 양광면 학산현동 109번지에서 태어나셨다. 용천군은 북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선을 맞대고 있고, 서쪽으로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구성된 황해에 접하여 있으며 용천평야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선생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의 국내외 정세를 뒤 돌아 보면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한일합방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도 호칭되는 강제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강제로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한일병합조약이 체결·성립된 당시에는 조약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았고, 순종이 직접 작성한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병합되었던 불행한 시기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중의 정치적 자각과 진출이 급속히 높아지면서 1920년대에는  민족운동이 국내외에 걸쳐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무장독립투쟁이, 중국관내에서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이, 국내에서는 노동·농민·청년 운동이 활
발하게 전개되었다. 1920년대 당시의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고 또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도 이념, 주도세력, 방법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이러한 분열된 해방운동의 흐름을 타개하기위해 만들어진 단체가 신간회이다. 바로 김정흠 교수님이 태어나기 한 달 전인 1927년 2월 14일에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만든 국내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초대 회장으로는 월남 이상재선생께서 맡으신 민족독립단체이다.

선생님의 부친 김시형은 본관은 백천(白川)이고, 본적은 평안북도 용천(龍川)이다. 1894년(고종 31년) 2월 22일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대한광복군사령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부터 향리 서재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5년부터 월화면 주음동 증곡재로 국동 조병준을 찾아가 성리학과 경의학을 배웠다. 1915년부터는 향리 서재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3·1독립선언 시에는 양광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선도하고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동년 4월 15일 대한독립단 조직에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이 분열된 후에는 민국독립단 도총재 조병준 휘하에서 1920년 11월 임시 정부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부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동시에 광복군사령부 교통부장으로서 홍식(洪植), 백의범(白義範), 고득수(高得秀) 등과 함께 국내에 진입하여 용천(龍川), 의주(義州)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5일 용천군 양광면(楊光面) 미륵동(彌勒洞)에서 수십 명의 일본 경찰과 교전 끝에 동지 홍식(洪植), 백의범(白義範) 등은 전사하였고, 자신은 좌측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동지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5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했다. 

그후 1936년에는 김구(金九), 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임시 정부 특파원으로 천진(天津),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37년부터는 김승학이 영솔한 임시 주 중국 북경비밀기관의 간부의 한 사람으로 첩보ㆍ연락ㆍ소집ㆍ선전 등 업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 후 1945년 8·15후 귀국하여 독립신문사 위원으로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을 위한 활약상으로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시형 (金時馨)님은 1951년 4월 15일 충청남도 온양에서 작고하시어 현재는 대전 애국지사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註·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4·291·292·432·488면·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8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76면, 「대전현충원묘적부」「독립유공자공훈록」 4권 559~560.
 
이처럼 암울하고 불행한 일제 강점기의 격동기에 소년 김정흠은 1935년 4월 용천군 북
쪽에 위치한 신의주의 약죽 심상소학교에 입학한 후 1941년 3월에 초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친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왜경들에게는 소위 배일감정이 뚜렷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자식으로 분류되어 언제나 왜경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불령선인은 일본제국이 강점기 식민지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부른 차별적 용어이다. 일본 총독부의 개황에 "3.1운동 이후 불령선인들의 배일감정이 통제할 수 없이 깊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만주, 간도지방의 독립군 활동 이후에는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이 수립되어 군 병력이 투입되었다. 간토 대지진시의 조선인 학살사건 때의 조선인 폭동조작 때에도 이른바 "조선인 폭도"들을 "불령선인"으로 표현하였다. 이 밖에 일왕이나 식민지통치에 대한 험담에서 사회주의 사상혐의 등 광범위한 반체제 인사들에게 불령선인의 딱지가 붙었다.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시형을 체포하기 위한 왜경의 감시가 날로 더해감에 따라 주위에 사는 친척 집들 까지도 불시에 찾아와 혹시나 숨어 지낼지도 모르는 수색작전이 허다하게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하여 가까운 친척들조차도 소년 김정흠이 자기네 집에 와서 지내는 것을 꺼려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아무도 가까이서 반가이 맞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소년 김정흠은 항상 외톨이로 혼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따뜻하고 환한 양지바른 곳을 찾아 혼자서 책 읽는 일 뿐 이었다. 이때의 이러한 상황은 평생토록 이어져 독서가 습관처럼 몸에 베이게 되었다.


- 교육자의 길 - 

곧 이어 중등학교는 중국 천진시 소재 천진일본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1941.4- 1945.3). 그 후 1945년 9월부터 1946년 까지 대학생활을 북경대학 공학원 기계공학과에서 1년 수료하고 나서 독립 후 다시 1947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1951년 9월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 이어 바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1953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6.25 동란 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설립된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전임조교로 발령받은 후 이듬해인 1954년 전임강사로 승진하여 창설된 학과의 교육기틀을 닦았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1957년 미국 로체스터(University of Rochester)대학에 유학하여 당시로는 드물게 원자핵물리학 이론 연구로 1961년 박사학위를 취득 하였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원자핵 j-j 결합 껍질모형을 써서 질량수 A가 20≤A≤120인 원자핵에 작용하는 유효 n-p 상호작용의 성질을 연구하였다. 특히 1960년 초 원자핵의 기저배위에 속하는 low-lying level에 대한 실험이 어려워 바닥상태의 스핀과 홀짝성(parity)
만이 알려져 있을 당시, 이를 바탕으로 하여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수가 기수-기수 핵(odd-odd nucleus)의 바닥상태 부근에 있는 들뜬상태에 대한 준위구조를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귀국한 후에는 고려대학교 학부 및 대학원생들은 물론 전국 각 대학의 전임교수가 매우 부족하던 시절인 1960년대 3-4개의 수도권대학을 포함하여 4-5개 지방대학의 대학원생들에게 양자물리학 및 원자핵물리학 강의를 통해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안타가운 일은 선생님께서 1961년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한 이래 원자핵물리 이론 연구를 더 이상 계속해 펼쳐나가지 못하신 점이 못내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당시로서는 원자핵물리학 이론 등을 입증해 보일 수 있는 입자가속기를 이용한 원자핵반응 실험은 생각조차도 전혀 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였다. 요즈음처럼 우리나라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국립도서관이나 또는 대학도서관 등에서 전문학술지도 자유롭게 참조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국제학회 참석을 통한 국제간에 활발한 학술교류며 정부지원의 연구비 등이 충분히 이루어 졌더라면 틀림없이 선생님께서도 원자핵물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여 큰 업적을 내셨으리라 생각된다. 

 1957년 김정흠은 미국 로체스터대학으로 유학하여 원자핵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61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학부 및 대학원생들에게 전과는 전혀 새로운 물리학교육 기법인 Physical Science Study Committee(PSSC) 물리실험 등 다양한 방식의 미국식 물리학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PSSC 물리교육 프로젝트는 김정흠 교수가 미국 유학을 시작하던 1957년에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1961년에 미국 전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 보급되어 물리교육에 새 바람을 크게 불러일으킨 바 있다.

Physical Science Study Committee(약칭PSSC)는 원래 미국의 고등학교 물리교육을 개량 발전시키기 위한 대학의 교수와 고등학교 교사들의 모임이다. 미국국립과학재단(NSF)의 적극적인 경제적 후원으로 1956년 MIT 물리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공계나 인문계를 막론하고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선택하는 학생들에게 급변하는 시대에 현대인으로서 보다 나은 과학적 소양을 지니도록 하기 위하여 물리학의 보다 기본적인 면과 지적이고 미적(美的)이며 역사적인 면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바람직한 기대효과를 얻기 위하여 물리교육 자료를 집대성하고, 아울러 교사들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대책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는 등 일련의 혁신적인 물리교육 개혁을 시도한 기획 사업이다. 

1960-1968年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팽배한 중고등학교 과학교육 개선운동에 발맞추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교육 개선 위원회 회원 및 문교부 한미과학 교육 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중고교 과학 교육의 개선 및 진흥에 힘쓰고 또 이를 문교부로 하여금 채택하게 하여 교과과정 개정에 반영시켰다. 

  김정흠교수는 1967년에 한국물리학회 편집위원장으로서 일찍이 학술지의 국제화를 강조하며 영문 학술지인 JKPS(Journal of the Korean Physics Society)를 창간함으로써 국제학술지로 크게 성장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인용문색인(citation index)에 포함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점 등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화 시대의 선도자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1968년부터 2년 동안 미국 페어리디킨슨(Fairleigh Dickinson)대학 물리학과 초빙교수로 연구년을 보내고 있을 당시 한국물리학회 미주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마침내 1970년 4월 워싱턴 D.C.에서 한국물리학회 미주지부가 탄생되었다. 

또한 1967년 3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신설에 따라 물리교육전공 석사과정을 신설하여 현직 중․고교 교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대학원생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에는 이학부장으로 취임하여 미국식 선진기법에 의한 학교행정개혁안 및 평가방법을 통한 종합적인 대학 발전방안 등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 행정개혁 발전방안에는 오늘날 우리나라 각 대학에서 실시하고 있는 신임교수 채용방법, 교육 및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평가하는 교수 호봉승급 및 직급승진, 그리고 정년보장 제도 등을 광범위 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인 제안은 불행하게도 당시 우리나라의 열악한 교육환경이나 정부로 부터의 연구지원 제도 등이 전무한 상황에서 바로 받아드리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실정이었다. 따라서 선생님의 남보다 30년 정도 시대에 앞서가는 이상적인 제안은 매우 훌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대학당국은 물론 많은 동료 교수들로 부터도 거센 저항에 부딪쳐 결국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또한 1983-1986년에는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중, 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재교육 기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격려하기도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한국물리학회 뿐 만 아니라 한국천문학회의 창립회원(발기인 겸)으로  1965년에서 2000년까지 35년간 감사(단 1970-1972 2년간 평의원)를 계속 맡으면서 천문학회 재무위원장도 겸하며 한국천문학회를 오늘날처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다. 특히 국립 천문대를 설립할 때는 국립천문대 건립준비위원회 위원, 국립천문대 대지선정 위원으로 있으면서 천문대설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선생님은 1972년 이래 대한화학회와 한국원자력학회의 종신회원이셨다.

한국물리학회 발족 당시부터 창립 정회원으로 주도적인 참여를 한 김정흠 교수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학회 발전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셨다. 먼저 학회 총무간사로
서 기구 및 제도를 확립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저명한 원자핵 물리학자인 코넬
대학의 베테(Hans A. Bethe) 교수 및 스텐포드대학의 홒스테터(Robert Hofstadter) 교수 등 여러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을 국내로 초빙하여 초청강연을 개최하는 등 학술활동 활성화 및 국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더욱이 편집간사 재임 중에는 학회지인 새물리를 편집, 제작하는 한편 아직 우리나라 학계가 미처 국제화가 되어 있지 않은 1967년 편집위원장 시절에 이미 영문학술지인 Journal of Physical Society(JKPS)를 추진하여 국제학술지 발간의 토대를 마련 하셨다. 이러한 선생님의 선구적인 혜안으로 1992년에는 국제적 공인을 받는 SCI 등재논문으로 인정되어 오늘날 영향지수(impact factor)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국제학술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다. 

또한 1977년에는 한국물리학회에 용어심의위원회를 설치하여 용어심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그때 까지 통일되어 있지 않던 많은 물리학 학술용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그 결과 1982년 드디어 물리학용어집을 완성하여 발간함으로서 후학들로 하여금 유용하게 이용토록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한국물리학회 창립 이래 사업담당 상임운영위원, 총무간사, 편집간사, 총무이사, 편집이사, 편집위원장, 원자핵물리 분과위원장, 물리학용어심의위원회 위원장, 이사, 감사 및 한국물리학회 회장 등 1955년부터 1991년 까지 36년 동안 쉬지 않고 한국물리학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 과학대중화를 위한 계몽활동 -

 또한 1977년에는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 홍문화 박사에 이어 제 2대 회장(1982-1988)으로 재직하면서 협회를 중심으로 과학대중화를 위한 각종 심포지움, 세미나, 대중강연회 등을 통해 과학기술을 일반대중에게 알기 쉽게 알리는 계몽사업을 꾸준히 펼쳐오셨다. 이 기간 동안 선생님은 일부 사비를 들여 4개 부문에 걸친 한국과학저술인협회상 제도를 만드셨다. 그리고 1996년부터 2005년 까지는 명예회장으로 기여하셨다. 

이 당시 선생님은 연평균 200자 원고지 5000매(최다 8000매)에 달하는 과학기술진흥 기사를 집필하시곤 하였다. 그리고 국내 여러 초․중․고교 및 대학, 그리고 일반기업체에 초청되어 기초과학 및 첨단기술의 연구개발 중요성을 강조하며 알기 쉬운 과학 해설 등을 
하시곤 하셨다. 이 밖에도 전국 초등학교 어머니회, 중고등학교 과학의 날 행사, 각 도의 과학관의 과학의 날 행사, 대학교 축제 시에 초청되어 첨단과학의 놀라운 발전상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년 평균 100회, 최대 연간 180회에 걸친 과학기술계몽 강연을 하였다. 아울러 여러 TV 방송국 및 라디오방송국(KBS, MBC 및 SBS에 약 12년간, EBS 교육방송 약 15년간)에 출연하여 알기 쉽고 재미나는 과학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과학의 대중화와 생활화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문교부 등 정부 및 각 공
공기관 위원회 이사로서 과학진흥정책 수립 및 실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크게 공
헌하셨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약 20년간 KBS 과학프로그램(약 30분, 매주 1회 또는 2회)에 출연하여 알기 쉽고 재미나는 과학을 소개( 신비스런 과학, 과학 탐험대, 미래사회, 정보화 사회, 도토리박사 등의 프로그램 이름으로 약 10~12년 계속)하여 일반대중 및 초중학교 학생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EBS 라디오 프로그램(무엇이든 물어보세요, 5분 방송, 매주 4회 정도씩)에 출연(약 13~14년간)하여 주로 초등학교 학생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다. 기타 MBC, SBS 등에 비정기적으로 출연하여,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과학의 대중화, 생활화에 이바지 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일반대중 및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과학기술에 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활동을 펼치며 과학 한국의 도약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셨다. 

1984년대 초 에는 서울법대 김증한(초대회장 1984-1989)교수와 함께 사단법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를 설립하여 제 2대 회장(1989-1994)으로서 지적소유권의 중요성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는 동시에 저작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법적 구조 활동을 하는 등 다가 올 미래 고도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는 기반을 굳게 다지는 선구적 역할을 하셨다. 

1978년에는 산학협동재단(한국무역협회 산하재단)의 협력으로 사단법인 한국이론물리학회 및 화학연구회를 설립하고(초대회장 이태규박사), 물리학분야 담당이사, 부회장으로 재직하며 기초물리학 육성을 위해 매년 3명씩의 물리학자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외에 통계물리학, 소립자물리학, 원자핵물리학, 천체물리학, 의학물리학 분야 등에 관한 국제물리학 심포지움을 개최하는 등 기초물리학 발전에 기여 하였다.

1985년부터 1987년에는 제 11대 한국물리학회 회장으로서 학회업무에 전념하시며 적자에 시달려오던 학회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찬조회원을 받아들이고, 물리학 실험교재를 새로 편집하는 등의 노력으로 마침내 학회재정을 오랜 기간에 걸친 적자운영으로 부터 벗어나 흑자로 전환시켰다. 그 밖에도 일본물리학회와의 상호교류협력 협정을 맺었을 뿐 만 아니라 타이완에 있는 그 당시 중국물리학회와도 같은 취지의 상호협력협정을 추진하던 중 이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학회가 오늘날과 같이 국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크나 큰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회장 임기 직후에는 물리학회에 3年 만기 액면 700만원 (판매가 500만원)의 발전기금을 기증하기도 하셨다.

또한 1985년부터 1987년에는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으로서 과학교육 및 컴퓨터 교육의 조기 초중고교 교과과정 도입을 제창하여 당시 문교부로 하여금 이를 반영 및 집행토록 한 공로가 크다. 선생님은 작고하시기 직전 까지 50여 년 동안 고려대학교는 물론 전국 10여개 대학 및 대학원생들을 위한 물리교육에 헌신적으로 봉사하셨
다. 

1989년 이래 10년간 한국정보문화센터 이사로 있으면서 전 국민의 정보마인드를 일깨워주었고, 또 같은 센터의 정보화 추진위원회 운용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서울을 위시로 전국 각 시도의 정보화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한국과학문화재단(한국과학기술 진흥재단은 그 전신)의 각종 위원 및 의장으로 임명되어 이 재단의 각종 진흥사업에도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셨다.

선생님의 이처럼 꾸준한 청소년 및 일반대중을 위한 과학계몽 활동에 힘입어 지난 1990년 봄 어느 날 낯모르는 노인이 연구실로 찾아와 고려대 물리학과 재학생을 위한 기금(백운장학기금)으로 유용하게 활용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거금 8억원(당시 미화 110만 달러 상당)을 기증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중에 알아본 즉 이 분은 한국은행을 거쳐 국민은행장을 역임한 후 은퇴하신 서정국(俆廷國)님이었다. 이 분은 보성전문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금융계에 종사하시던 중 1960년대에 한국은행 뉴욕 사무소장으로 재직할 당시 Apollo 우주선계획으로 미국 전체의 온 나라가 들끓고 있을 때 기초과학이 튼튼해야 선진강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선진 과학기술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기초과학 중에서도 특히 물리학의 발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크게 깨닫고 있던 차에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을 통해 김정흠 선생님께서 열성적으로 기초과학의 중요성, 그 기초과학의 기초라고도 할 물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는 모습을 매스컴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서정국님께서는 마침내 이에 크게 감명 받아 모아놓은 퇴직금 전액을 기꺼이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기증하게 되었다고 전하시던 말씀이 이제는 전설적인 얘기로 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결국 두 선생님 덕분에 이처럼 값지게 기증받은 백운장학기금을 통해 수많은 물리학도들에게 지금까지도 장학금을 지원해 오고 수 있다. 이들 장학생 중에는 이미 물리학 분야의 글로벌 리더가 되어 국내외 대학 및 유수 연구소 그리고 첨단산업체 등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다. 

대학입시 때 마다 수험생 면접을 하며 왜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 지원했느냐고 그 동기를 물으면 절반 이상의 수험생들이 김정흠 교수님의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나 강연 또는 TV를 통한 대담 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지원했다는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매년 졸업예정자들이 마련한 사은회 자리나 다른 과학문화 행사에 참석하실 때 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항상 주문하시는 말씀이 있다. 즉 앞으로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 활동하게 되면 매달 수입의 십분의 일 정도는 새로운 책을 구입하는 일에 사용하라는 당부이시다. 즉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드리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효율적으로 값지게 활용하라는 당부 말씀이 떠오른다. 선생님 스스로는 다른 용도의 지출 등에 굉장히 절약하는 분 이었지만 책을 구입하는 일 만은 조금의 아낌도 없으셨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원자핵물리연구실에서 직접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배출한 졸업생은 박사학위 8명, 석사학위 20명, 교육학 석사 6명 그리고 대략 1,200여명의 학부생 등이 있다. 

1992년 정년퇴임 직후인 1993년 3월~8월 사이에는 한국고등과학원(KAIST) 초빙 석좌교수로 봉직하면서 우수과학도를 양성하였으며 이 밖에도 선문대학교 등에서 오랫동안 석좌교수로 활동하셨다. 작고하시기 직전 2-3년 동안은 일본정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국립대학에 진학이 결정된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일반물리학 일어강의를 열정적으로 하시기도 하였다.

2005년 5월 중순 입원하시기 직전까지만 해도 여느 때처럼 대학 강의와 더불어 정력적으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시며 장래 계획을 구상하시던 선생님께서 홀연히 떠나시니 허전하고 슬픈 마음 금할 길이 없다. 선생님께서 한 평생을 한결같이 펼치시던 과학기술 계몽활동이 우리나라 꿈나무들을 통해 활짝 꽃피워져 더욱 더 부강한 선진 과학기술 강국으로 발돋움 하는 모습을 하늘나라에서 지켜보시며 편안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해 드린다.

가족으로는 부인 황신애 여사와의 사이에 2남 3녀를 두셨다. 안타깝게도 사모님께서는 15년 이상 지병으로 스스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지내셨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단 하루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극진한 병간호를 해 오신 일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2005년 10월 2일 작고하시어 천안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시다. 사모님께서도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채 2년이 안 되어 작고하시어 선생님 곁에 잠들어 계시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김정흠 교수를 단지 한 분의 물리학자라기보다 과학대중화를 이끈 “국민 과학자” 그리고 미래의 과학기술 발전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진 “미래학자”로 더욱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과학기술문화 진흥을 위한 선생님의 지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과학기술부문 국무총리상,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상, 서울특별시 문화상(기초과학분야) 및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혁신장) 등을 수상하셨다.
  

- 미래학자로서의 예측 -

 우리나라 1세대 물리학자인 고(故) 김정흠 교수께서 1980년 11월 3일부터 1982년 5월 8일까지 90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서기 2000년 미리가 본 미래의 세계’라는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물리학자이자 미래학자이기도 한 김정흠 교수께서 1980년대에 21세기 미래를 내다보며 동아일보에 연재 기사를 쓰신 내용이 30년 후에 얼마나 예측이 맞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인용해 보고자 한다.

註· 아래 글은 동아사이언스가 발행하는 인터넷 과학신문 ‘더사이언스’가 창간 3주년을 맞아 ‘1980년에 바라본 2000년대의 과학’ 연재를 원호섭 동아사이언스 기자가 정리한 내용을 소개한 내용이다.                                                                2011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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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TV도 많이 보급되지 않았고 소니의 워크맨이 출시된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인 1980년대 말, 김 교수는 노트북과 휴대용TV 등이 2000년이 되면 개발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 밖에도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시차근무제’와 ‘재택근무’ 등 미래 시대의 변화될 생활상을 내다봤습니다. 

당시 예측했던 기술이 얼마나 현실화 되었는지 ①1980년대 바라본 2000년의 생활 ②2000년대의 가정과 대학 ③현금자동입출금기와 자동판매기 ④휴대전화 ⑤컴퓨터와 인터넷 ⑥전자기기 ⑦비행기와 배 ⑧인공위성과 우주 ⑨1980년에 바라본 2030년 ⑩2040년의 미래 등 총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오전 8시 30분. 구보 씨는 컴퓨터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잠을 깼다. 오늘은 재택근무 하는 날이라 늦잠을 잤다. TV를 켜고 책상에 앉으니 회사에 출근한 상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늘 할 일에 대해 지시받고, 검토해야 할 보고서를 팩스로 수신했다. 보고서 작성은 회사에서 지급한 400만 원짜리 워드프로세서로 하면 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근처에 있는 자동화기기(ATM)로 부모님께 용돈을 송금했다. 버스에서는 손바닥 크기의 초소형 TV ‘초워크맨’으로 뉴스를 시청했다. 오후에는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한다. 깔끔한 옷을 챙겨 입고 ‘전자향수조제기’를 이용해 샤넬 향의 향수를 만들어 옷에 뿌렸다.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를 챙겨들고 카드 열쇠로 문을 잠근 뒤 집을 나섰다.” 

구보 씨의 하루다. 구보 씨의 하루는 1세대 물리학자이자 과학대중화에 앞장섰던 고 김정흠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1927∼2005)가 1980년 11월 3일부터 1982년 5월 8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90편의 칼럼 ‘서기 2000년 미리 가 본 미래의 세계’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놀랍게도 ‘뭘 말하고 싶은 거야’라고 물을 정도로 요즘 사람들의 일상과 별다를 것 없어 보인다.》 

1980년에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컴퓨터가 회사와 연구소 등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였다. 컬러 TV도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지금은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지만 당시에 획기적인 제품으로 각광받았던 소니의 휴대용 카세트리코더인 ‘워크맨’이 개발된 지 1년 정도 된 시점이다. 

● 버스에서 TV 보고, e메일 보내고 

1980년대에 살던 과학자가 예측한 2000년대의 모습은 흥미롭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일부는 이미 2000년이 되기 훨씬 전에 등장했고, 일부는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비용 등의 문제로 상용화되지 않았다. 

전자오븐(전자레인지)이 가정에 보급되고 은행에 가지 않고도 ATM을 이용해 돈을 이체하거나 인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TV를 볼 수 있는 ‘초워크맨’은 휴대전화의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을 연상시킨다. 현금이 없어도 지불이 가능한 ‘전자통화제’는 현재의 신용카드와 일치한다. 007가방을 열면 영상통화와 문서작업이 가능한 액정화면이 나타나고 키보드를 이용해 정보를 입력할 수 있는 ‘휴대용 영상전화기’는 노트북이나 태블릿PC와 비슷하다. 

김 교수는 당시 이 기술이 2030년에나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지만, 정보통신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이미 사용하고 있다. 경찰수사 기록과 대입시험 성적의 전산 관리, e신문(인터넷 

신문)의 활성화, 개인용 무선 휴대전화기도 2000년 전후로 모두 이뤄졌다. 

● 융합 트렌드는 읽지 못해 

하지만 개인 PC, 인터넷, 휴대전화의 융합 등을 예측하지 못해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것도 보인다. 팩스를 이용해 직접 서류가 오고가는 ‘전자우편’, 가정용 유선 전화기와 연결해 전화번호를 저장하는 ‘전자 전화부’ 등이 대표적이다. TV와 전화선, 컴퓨터를 연결해 다양한 지식을 전화와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자도형정보망 장치’는 웹의 발달로 개인용PC 한 대로 구현할 수 있다. 원하는 음악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판매하는 ‘카세트 자판기’는 2009년도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디지털 음원의 출현과 MP3플레이어의 개발로 이름만 남게 됐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도 있다. 2000년대에 상용화될 것이라고 내다본 휴대용 전자향수 조제기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화합물을 섞어 원하는 냄새의 향수를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장비다. 압축공기와 액체 증발을 이용해 캔 음료의 뚜껑을 여는 순간 급속 냉각으로 음료를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즉석 냉동 깡통주스’는 기술적으로는 가능하고 시제품도 나왔지만 비용 등 문제로 상용화에는 실패했다. 

● 과학 기반 예측으로 미래의 토대 마련 

과학기술자들이 미래의 과학기술을 상상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김 교수가 칼럼을 연재하기 9년 전인 1971년에도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는 당시 저명한 과학자들과 함께 ‘서기 2000년의 한국에 관한 조사연구’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 보고서는 2000년경이면 무인공장, TV 강의, 전화와 컴퓨터를 이용한 종합통신망이 형성 등을 예상했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발전 비중이 70%를 차지한다거나 연안 대륙붕에서 석유가 발견되고 태아의 성별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 등은 빗나갔다.


 학력 및 주요경력

1947-1951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이학사)
1982-1988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1951-1953
 서울대학교 대학원(이학석사)
1983-1986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장
1957-1961

 미국 Rochester 대학교
 (이학박사)
1985-1987
 한국물리학회 회장
1953-1992

 고려대학교 
 전임강사, 조교수, 교수
1985-1987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심의 위원
 회 위원
1992-2005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89-1998
 한국정보문화센터 이사
1980-1988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이사
1989-2003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상훈

1972
대한민국과학기술상(국무총리상)
1992
서울특별시 문화상(기초과학분야)
1983
국민훈장 동백장
2002
성봉물리학상(한국물리학회)
1985
대한민국과학기술상(대통령상)
2002
대한민국과학기술훈장 혁신장





발표 학술 논문 목록

1. Neutron - Proton Interactions in Odd Nuclei, Nucl. Phys. A 99, 161(1967)
2. Mass Formula in Shell Model, J. Kor. Phys. Soc.,1, 97(1968)
3. Approximate Nuclear Wave Function, J. Kor. Phys. Soc., 3, 21(1970)
4. Pulsars 와 중성자 별, J. Kor. Phys. Soc., 3, 17(1970)
5. Weak Gravitational Field Around a Current Carrying Cosmic String, JKPS, 
   21, 353(1988)


저 서 및 번 역 서


1. 專 門 書 籍

自然科學槪論 ( 共著 )   高麗大出版部     1965.  3.  1
敎養物理學 ( 共著 )  高麗大出版部   1974.  3.  1

自然科學槪論 ( 編著 )  學力硏究社   1974.  4.  5
自然科學槪論 ( 共著 )  高麗大出版部   1978.  4. 15

現代物理 ( 共著 )  泉  文  閣   1978.  3. 10
一般物理學 ( 共著 )  高麗大出版部   1982.  3.  1
物理學의 發展과 物理敎育(共著)  서울大師大 科學敎育硏究所 1978.  7. 10


2. 飜 譯 書 ( 專門書籍 )

J. L. Powell,  量子力學 ( 共譯 ) 探 求 堂 1963.  4.
B. Craseman
K. R. Symon  力   學 ( 共譯 )  探 求 堂 1964.  1. 20
R. S. Shankland  現代物理學 ( 共譯 ) 文 運 堂 1964.  5. 25
R. Resnick, 理工學徒를 위한 物理學 ( 共譯 ) 文 運 堂 1965.  3. 15
D. Holliday
PSSC 編        PSSC 物理 ( 共譯 )  探 求 堂      1965.  7. 20
L. A. Pipes  應用數學 ( 共譯 )   大韓敎科書株式會社 1964. 12. 20
A. H. Cromer 生命科學을 위한 物理學 ( 共譯 )  喜 重 堂      1983.  7. 20
S. Gasiorwicz  量子物理學 ( 共譯 ) 探 求 堂 1985.  3.  5
南部陽一郞  쿼  크 ( 共譯 )  電波科學社 1983.  6. 10
S. Gasiorwicz  現代物理學 ( 共譯 ) 鍾 路 書 籍 1987.  2. 20



3. 飜 譯 書 (啓蒙書)

G. Gamow  物理學을 뒤흔든 30年 電波科學社 1975.  1. 15
M. Hoskin  科學者와의 對話  中央日報社 1978.  3. 25
D. Huff   統計의 魔術  청아出版社 1983. 11. 25
일본경제신문사     尖端技術 100 가지(監譯) 每日經濟新聞社 1983. 12. 15


4. 著 書 (啓蒙書籍)

進路의 助言    高麗學力硏究社  1975.  6.  1
未來의 바다    中央日報社  1985.  2. 20
未來의 世界    샘 터 社  1981.  7.  5
미리 가 본 未來    尋 雪 堂  1984.  2. 28
세상 눈부시다    興 士 團  1985. 10. 12 
컴퓨터의 지식과 활용   大韓商工會議所  1985.  9. 20
2000년대의 주역들   文化公報部  1984.  6. 30
기술 선진화의 길          科學技術處  1984.  7.
첨단科學時代    청아出版社  1986.  7. 15
선진조국으로 가는 길   文化公報部  1983. 12. 20
오늘의 과학, 내일의 사회               삼성출판사         1986.  6. 25
컬러판 學習科學百科 9    啓 蒙 社  1975.  2. 10
  技術의 發達 
學習그림科學 19    啓 蒙 社  1982.  7. 25
  내일의 科學I

그림나라 100(13)    동화出版社  1982.  2. 25
  로보트떡쇠
꼬마 과학자 시리즈      한국생활과학진흥회         1986.  3. 15
  과학의 파노라마 (1)
  과학의 파노라마 (2)
  과학의 파노라마 (3)       1988.
  과학의 파노라마 (4)       1990.  3. 15
7년마다의 바람기       情報時代社           1988.  9. 15
김정흠 박사의    글수레    1990.  5.  5
  재미있는 컴퓨터 여행
  재미있는 과학 여행                     〃                   1990.  5.  5
  재미있는 미래 여행                     〃                   1990.  5.  5
재미있는 과학이야기 2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1991. 12. 30
  科學의 未來      
해양과학 이야기                        연구사                  2001.  8. 28
눈은 왜 내릴까요?                      다섯수레                200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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