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학부]故 현원복 선생 회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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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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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송상용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화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인디애너대학교에서 과학사ㆍ과학철학을 전공했다. 성균관대 조교수, 한림대 교수, 한양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한림대 사학과 명예교수이다. 리즈대, 케임브리지대, 베를린공대, 함부르크대, 뮌혠대, 추오대, 산탄나고급연구대 객원연구원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토호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철학연구회, 한국과학사학회,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한국과학철학회, 한국생명윤리학회, 아시아생명윤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창립회원으로서 종신회원, 남북과학기술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 한국과학기술사편찬위윈장을 역임하고 현재 정책학부 원로회원이다. 저서에 <우주ㆍ물질ㆍ생명>, <한국과학기술 30년사>, <서양과학의 흐름> 등이 있다.
춘당(春堂) 현원복은 1929년 9월 4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홍경리에서  현승진, 주귀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흥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때인 1938년 서울로 이사해 아현공립심상소학교에 편입했다. 1942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했고 해방을 맞아 고향에 가 있다가  월남해 1949년 졸업했다. 그 해 연희대학교 이학원 생물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환도 후 서울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녔으나 학점을 인정해 주지 않아 복학하지 못했다. 취직한 다음 1959년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해 야간 강의를 듣고 1963년 졸업했다. 1984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치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원복은 1950년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어 남하했다. 1952년 대구에서 통역중위로 임관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 등에서 근무했고 1956년 보병대위로 전역했다.  1958년 세계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입사했다. 1960년 동화통신사 외신부 차장으로 옮겨 5년 일했다. 1965년 서울신문사 학술부 차장(과학담당)이 되면서 본격적인 과학기자로 뛰기 시작했다. 
1967년 가을 현원복은 미국에 가서 컬럼비아대학의 펠로우십을 얻어 저널리즘대학원 고급과학보도과정에 등록했다. 1년 과정을 끝내고 디플로마를 받았다. 서울신문 주미 특파원에 임명되어 제22차 유엔총회를 취재했다. 
1968년 귀국해 과학부장이 된 현원복은 의욕적으로 일했다. 아폴로 11호를 절정으로 70년대에 들어와 과학저널리즘은 급속히 쇠퇴했다. 여러 신문들이 과학부를 없애고 있었다. 잠시 논설위원, 기획위원을 겸임하다가 1975년 퇴사했다. 한창 일할 46살 때였다.
1970년대에 현원복은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했다. 전파과학사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문고판 현대과학신서를 기획했을 때 동참해 <과학자의 길>(1973)과 <과학과 매스 미디어>(1978)를 냈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한양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에서 과학보도론을 강의했다. 1977년에는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 있는 과학자, 언론인, 출판인들을 규합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창립에 참여해 부회장에 뽑혔다. 
 현원복은 신문사를 떠난 뒤 최형섭 과기처장관의 배려로 한국연구개발단지 공동대변인 자리를 얻었다. 월간 <한국연구개발단지 소식>을 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단지 소식>을 보면 주요 과학기술 출연 연구기관의 연구활동과 동정을 알 수 있어 과학기술계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의 광장 구실을 했다 
 1990년 공동대변인을 그만두고  오피스텔을 얻어 과학 칼럼니스트(자유기고가)로 집필에 전력투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연구서 <대통령과 과학기술-한국역대 대통령의 과학기술 리더십->(과학사랑, 2005)과 자료집 <우리과학, 그 백년을 빛낸 사람들> 4권(과학사랑 2009)을 내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현원복은 75살까지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유유자적하다가 2010년 11월 19일 급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2011년 4월 16일 KAIST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사학회, 한국과학창의재단 STS 네트워크 포럼 공동 주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한국과학언론인회, 한국과학기자협회 후원으로 추모  모임 “과학 저널리스트 현원복”이 열렸다.
1. 현원복 선생과의 만남
내가 현원복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1년 여름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대 문리대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면서 1960년 창립한 이후 오랫동안 동면상태에 있던 한국과학사학회를 다시 살리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때마침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과학사학자 나카야마 시게루 박사 초청강연회를 학회 주최로 가졌다. 한국과학사학자 전상운 교수가 나카야마를 경주에 안내해 첨성대를 답사하고 그 기능에 관해 토론을 했을 때 서울신문 과학면이 그 내용을 크게 다루었다. 그 기사를 쓴 이가 현원복 과학부장이었다. 이  렇게 우리는 알게 되었고 자주 만나 과학과 과학사의 대중화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 무렵 전파과학사 손영수 사장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문고판 현대과학신서를 기획하고 있었다. 상임 편집기획위원으로 참여한 나는 현 선생에게 한국의 현대과학에 관한 책을 써 줄 것을 권했는데 그가 기꺼이 응해 나온 책이 <과학자의 길>과 <과학과 매스 미디어>였다. 1960년대의 영주 귀국 과학자들을 인터뷰해서 쓴 <과학자의 길>은 과학계의 주목을 끌었고 <과학과 매스 미디어>는 신문방송학과의 필수교재로 오래 읽혔다. 이를 계기로 나는 현 선생을 훌륭한 과학기술학자로 보게 되었다.
1977년 나는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 있는 과학자, 언론인, 출판인들을 규합해 한국과학저술인협회를 만들었다. 현 선생은 언론 몫 부회장으로 뽑혔다. 나는 간사장으로서 현 선생을 모시고 세미나, 국제회의, 산업시찰 등을 하며 90년대까지 함께 일했다. 
현 선생이 공직에서 은퇴해 집필에 전념한 이후에는 내가 잦은 해외 활동으로 너무 바빠 자주 뵙지 못했다. 토론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것이 많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2. 현원복이 걸어온 길
춘당(春堂) 현원복은 1929년 9월 4일 함경남도 신흥군 신흥면 홍경리에서  현승진, 주귀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의 손꼽는 실업가여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고향에서 유치원을 마치고 신흥공립보통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때인 1938년 서울로 이사해 아현공립심상소학교에 편입했다. 1942년 보성중학교에 입학했고 해방을 맞아 고향에 가 있다가 1946년 월남해 1949년 졸업했다. 1949년 연희대학교 이학원 생물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환도 후 서울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녀 24학점을 땄지만 연대에서 학점을 인정해 주지 않아 복학하지 못했다. 취직한 다음 1959년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해 야간 강의를 듣고 1963년 졸업했다. 1984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에서 정치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원복은 1950년 제2국민병으로 징집되어 남하했다. 1952년 대구에서 통역중위로 임관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 등에서 근무했고 1956년 보병대위로 전역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는데 당시 구직난은 심각했다. 고등공민학교 영어강사, 해병대사령부 번역사, 희망사 기자를 전전하다가 1958년 세계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입사했다. 1960년 동화통신사 외신부 차장으로 옮겨 5년 일했다. 1965년 서울신문사 학술부 차장(과학담당)이 되면서 본격적인 과학기자로 뛰기 시작했다. 우선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의학연구소, 방사선농학연구소, 중앙공업연구소, 지질조사소, 보건연구원, 농촌진흥청 산하 연구소들, 그리고 대학 연구실들을 찾아 연구개발 실태를 알아보고 기사화했다. 1966년 한국자연보존위원회와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수행한 비무장지대 생태계 조사사업은 현원복의 작품이었고 큰 성과를 거둔 성공작이었다.
1966년 현원복은 노총각을 면하게 되었다. 전 해에 친구의 누이의 소개로 만난 박정자와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신랑은 37살이었고 주례는 윤일선이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딸은 첼리스트 (템플대 강사, 사위는 경영학 교수), 큰 아들은 의원장, 작은 아들은 단국대 의대 교수다.
1967년 가을 현원복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컬럼비아대학의 펠로우십을 얻어 저널리즘대학원 고급과학보도과정에 등록했다. 동급생들은 미국과 캐나다의 쟁쟁한 현역 기자들이었다. 첫 학기에 다섯 강좌를 신청했다. 정부와 과학, 군사기술과 국제관계, 러시아, 소련의 과학사상을 수강했고 벨의 사회학, 우첸슝의 일반물리학 등을 도강했다. 1년 과정을 끝내고 디플로마를 받았는데 새로운 지식을 얻었을 뿐 아니라 많은 중요한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신문 주미 특파원에 임명되어 제22차 유엔총회를 취재했고 레드야드, 고광림, 전혜성을 인터뷰해 미국의 한국학 현황을 송고했다. 김완희가 이끈 한국 전자공업 타당성 조사단과 함께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기도 했다. 미국에 머문 한 해는 현원복 생애 최고의 기간이었다.
1968년 귀국해 과학부장이 된 현원복은 의욕적으로 일했다. 1950년대 원자력 기술 도입과 미소의 우주경쟁에서 비롯한 한국의 과학저널리즘은 전성기에 올라 있었다. 서울신문은 미국의 달 착륙을 전후해 11회의 독창적인 특집을 내보냈다. 그러나 호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폴로 11호를 절정으로 70년대에 들어와 과학저널리즘은 급속히 쇠퇴했다. 여러 신문들이 과학부를 없애고 있었다. 잠시 논설위원, 기획위원을 겸임하다가 1975년 퇴사했다. 한창 일할 46살 때였다.
1970년대에 현원복은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했다. 전파과학사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문고판 현대과학신서를 기획했을 때 동참해 <과학자의 길>(1973)과 <과학과 매스 미디어>(1978)를 냈다. 시의적절하고도 공을 많이 들인 역저였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한양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에서 과학보도론을 강의했다. 1977년에는 과학의 대중화에 관심 있는 과학자, 언론인, 출판인들을 규합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창립에 참여해 부회장에 뽑혔고 17년 동안 재임했다. 1978년부터 2002년까지는 과총에서 내는  월간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으로 봉사했다. 
 현원복은 신문사를 떠나며 미국 유학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최형섭 과기처장관의 배려로 한국연구개발단지 공동대변인 자리를 얻었다. 월간 <한국연구개발단지 소식>을 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단지 소식>을 보면 주요 과학기술 출연 연구기관의 연구활동과 동정을 알 수 있어 과학기술계의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의 광장 구실을 했다. 그것은 또한 해외의 한국인 과학기술자들이 국내 과학기술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매체였으므로 국내 연구기관이 해외 과학기술자들을 유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고정 사무실도 없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불안정한 자리였지만 15년을 꼬박 근무했다. 남는 시간에는 신문, 잡지, 사보의 청탁을 받아 엄청난 양의 글을 썼다. 이때부터 직함을 ‘과학저널리스트’라 써서 유명했다. 그것은 언젠가는 프리랜서로 독립할 것에 대비하려는 생각에서였고 일본 친구 이이누마 카즈마사가 쓰던 말이었다. 
1990년 공동대변인을 그만두고 1년은 사단법인 한국과학사회연구소 소장과 월간 <하이테크저널> 주간으로 일했다. 1991년부터는 오피스텔을 얻어 과학 칼럼니스트(자유기고가)로 집필에 전력투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연구서 <대통령과 과학기술 - 한국역대 대통령의 과학기술 리더십 - >(과학사랑, 2005)과 자료집 <우리과학, 그 백년을 빛낸 사람들> 4권(과학사랑 2009)을 내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현원복이 45년 동안 쓴 과학칼럼은 2500편이 넘고 방송과 강연도 500여회 했다.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7편, 저서는 32권이다.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1994년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진흥상(대통령)과 2001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과학기술부장관)을 받았다. 1994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출범했을 때 회원에 뽑혔으며 2000년 원로회원이 되었다. 700명 회원 가운데 과학자가 아닌 사람은 열이 안 된다.
현원복은 75살까지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유유자적하다가 2010년 11월  19일 급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2011년 4월 16일 KAIST에서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과학사학회, 한국과학창의재단 STS 네트워크 포럼 공동 주최,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한국과학언론인회, 한국과학기자협회 후원으로 추모  모임 “과학 저널리스트 현원복”이 열렸다.
3. 과학저널리스트 현원복
현원복은 통신사에 근무한 7년 동안 적지 않은 과학기사를 번역했지만 과학에 관한 글을 쓴 것은 서울신문으로 옮긴 1965년부터다. 1966년 처음으로 이름을 드러낸 글은 10회 연재한 ‘인물로 본 한국 과학사화 시리즈’다. 홍대용, 최무선, 허준 등 10 사람의 전통 과학기술자를 소개했다. 잡지에 쓴 글은 “과학과 국가,” “연구 활동의 표리,” “우주의 미래”였다. 미국유학을 다녀온 다음 70년대에 쓴 서울신문 기명 칼럼과 잡지에 연재한 글들은 생활과학과 시평으로 다양하다. 
80년대에는 의료기술, 컴퓨터, 반도체 등 첨단기술, 미래 과학기술, 역사 속의 과학자, 현대 세계의 과학기술자가 추가된다. 90년대에는 기술사, 환경, 노벨상도 있지만 미래기술, 미래의학, 21세기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 첨단과학기술, 미래과학기술이 압도적으로 많다. 세계의 기업문화, 첨단산업, 미래산업까지 보인다.
과학저널리스트 현원복은 다른 대부분의 1세대 과학기자들보다 세가지 유리한 점을 갖고 있었다. 능통한 일본말 말고도 통역장교, 영어 교사ㆍ강사, 영문과 졸업, 미국유학을 거친 영어 실력이다. 국내에서 사회과학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미국에서는 과학사, 과학사회학, 과학정책학 강의를 들었다. 더욱이 그가 미국에 머문 때는 68혁명 직전이었다. 과학기술을 인문ㆍ사회적인 맥락에서 접근할 뿐 아니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분위기에서 공부한 행운아였다.
현원복은 1968년 미국과학진흥협회 (AAAS) 회원이 되어 기관지 Science 를 계속 받아 보았다. 그밖에도 Nature, New Scientist, Scientific American, Technology Review, Popular Science, Discover 등 주요 잡지들을 자비로 사서 읽었다. 그는 자료를 구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찍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자료를 5시간 정독하고 낮에 글을 쓰는 것이 일과였다. 이런 바탕이 그가 생활과학, 첨단기술을 넘어서 과학기술의 참된 모습을 밝히는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었다.
4. STS (과학기술학)의 선구자 현원복
현원복의 논문과 저서들은 과학기술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1971년 전파과학사가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현대과학신서를 기획했을 때 2권의 책을 썼다. <과학자의 길> (1973)은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어떻게 과학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들의 연구방법, 인생관은 무엇인가를 글과 인터뷰를 통해 보여 주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과학과 매스 미디어> (1976)는 과학저널리스트 17년의 경험과 컬럼비아대학에서의 미국 과학저널리즘 연구를 바탕으로 해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역저였다. 이 책은 시판은 부진했으나 신문방송학과의 필수 교재로 활용되었다.
일제 치하 1930년대에는 김용관, 안동혁 등의 주도로 과학을 발전시켜 민족의 갈 길을 찾자는 거국적인 과학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처음으로 분석 소개한 논문이 “1930년대의 과학기술진흥운동” (1977)으로 한국현대과학사 학계에 자극을 주었다. 의료윤리는 히포크라테스로 올라가는 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생명공학의 놀라운 진전으로 1980년대에 생명윤리가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97년 복제양 돌리의 탄생에 이어 황우석의 소 복제가 알려지자 한국에서도 폭발적인 논란이 일어났다. 김훈수, 문국진, 이정주와 함께 학술원 생명윤리 프로젝트를 맡은 현원복은 “생명윤리의 사회적 인식과 대책” (2000)을 발표했다. 여기서는 인간게놈 연구, 동물복제기술, 유전자검사, 연구용 동물과 관련된 생명윤리의 쟁점과 여러 나라들의 입장을 소개하고 한국의 대책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창기에 나온 주요 논문이었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을 논할 때 연구개발 투자, 인력, 논문과 특허의 질과 양 등이 문제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고통치자의 과학기술 리더십이다. 현원복의 <대통령과 과학기술> (2005)은 대통령의 리더십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제시한 다음 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여섯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과 리더십을 비교 분석하고 있다. 특히 역대 대통령들의 과학정책이 나온 배경과 비전을 탐구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들을 발굴하고 미국, 프랑스, 영국 국가수뇌들의 경우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현원복의 마지막 저술 <우리과학, 그 백년을 빛낸 사람들> 3권 (2009) 은 여명기의 우리 과학기술 씨종자들이 어떻게 터전을 닦으면서 과학기술 인력을 늘려 나갔으며 요람기를 맞아 체제를 정비하고 마침내 오늘의 도약기의 발판을 구축한 지난 백년 동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자들의 숨결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별책은 1만명의 한국과학기술인명록이다. 이 책은 현원복이 평생 모은 자료의 집대성이다. 그것은 앞으로 끊임없이 보완될 것이므로 완성되지 않은 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저널리스트 현원복은 처음부터 STS(과학기술학)적 통찰력이 들어간 글들을 대중을 상대로 썼다. 그 자신은 STS 학자라고 자처한 일이 없지만 전문가에게도 인정받을 만한 논문과 저서들을 남겼다. 현원복은 STS의 선구자였다.
<부록 1> 현원복 연보
학력
 1949.6  서울 보성중학교 6년 졸업
 1949.9  연희대학교 이학원 생물학과 입학
 1952.7  군 입대로 위 대학 중퇴
 1963.3  성균관대학교 문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문학사)
 1968.6  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고급과학보도과정 수료(Diploma) 
 1984.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졸업(정치학석사)
경력
 1952.7-1956.3 대한민국 육군 복무(보병대위 전역)
 1958.6-1960.5 세계통신사 외신부 기자
 1960.6-1965.4 동화통신사 외신부차장
 1965.5-1975.3 서울신문사 학술부차장, 주미특파원, 과학부장. 논설위원, 기획위원(겸직)
 1975.4-1989.12 한국연구개발단지 공동대변인
 1969.9-1985.2   한양대학교 문리대 신문방송학과 강사(과학보도론)
 1976.3-1984.2   성균관대학교 문리대 신문방송학과 강사(과학보도론)
 1977-1994   한국과학저술인협회 부회장
 1978-2002   월간 <과학과 기술> 편집위원
 1990.1-1991.2   사단법인 한국과학사회연구소 소장
 1990.1-1991.2   월간 <하이테크저널> 주간
 1991.1-2010.12   과학 칼럼니스트(과학 자유기고가) 
 1994.11-2000.12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
 2000.12-2010.11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상훈
 1970  서울시의사회 사랑의 금십자상(서울시의사회장)
 1985  한국과학저술인협회 공로상(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1991  대한민국 과학기술상 진흥상(대통령)
 1993  제11회 한국과학기술출판상(저술부문)(대한출판문화협회장)
 2001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신문/잡지부문)(과학기술부장관)
<부록 2> 현원복의 저술 목록
A. 국내 학술지 발표논문
(1) 1930년대의 과학기술진흥운동(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민족문화연구> 12, 1977)
(2) 과학기술의 대중화(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국과학기술 30년사>, 1980)
(3) 서기 2000년의 뉴미디어(한국신문학회, <신문학보> 18호, 1984)
(4) 1980년대 과학기술정책의 분석 및 전망에 관한 연구(한국과학재단, 1986)
(5) 소련의 과학정책(한양대학교 중소연구소, <중소연구> 13권 2호, 1989) 
(6) 한국인의 과학기술에 관한 이해도 조사연구(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1998)
(7) 생명윤리의 사회적 인식과 대책(대한민국 학술원, <학술원논문집> 자연과학편 39집, 2000)
B. 저서 [32권]  
(1) 자연의 신비(계몽사 1967)
(2) 과학자의 길(전파과학사 1973)
(3) 과학과 매스미디어(전파과학사 1976)
(4) 최신첨단기술백과(정우사 1984)
(5) 열 사람의 과학자(전파과학사 1984)
(6) 과학의 세기(과학세기사 1984)
(7) 아인슈타인의 생애(공역)(전파과학사 1985)
(8) 백만인의 컴퓨터, 반도체(과학세기사 1985)
(9) 백만인의 핼리혜성(과학세기사 1986)
(10) 첨단기술에 도전하는 세계의 정상기업(과학세기사 1986)
(11)-(15) 과학발명발견사(5권)(과학세기사 1986)
 (i) 과학의 뿌리  (ii) 과학의 진보  (iii) 산업기술
 (iv) 화학의 발견 (v) 생물학. 의학
(16) 탐험의 역사(과학세기사 1986)
(17) 21세기의 과학(전파과학사 1988)
(18) 첨단과학기술용어사전(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1989)
(19) 다가오는 2000년대의 한국(공저)(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1991)
(20) 21세기를 여는 첨단과학기술(공저)(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1991)
(21) 세계 30대기업의 숨겨놓은 경영전략(한길사 1992)
(22) 하이테크달걀(동아출판사 1993)
(23) 나노테크 숟가락(동아출판사 1994)
(24) 자연의 슈퍼모델(동아출판사 1996)
(25) 미리 가본 21세기(겸지사 1997)
(26) 정말 같지 않은 미래세상(다락원 1998) 
(27) 나노기술과 인간(까치글방 2005) 
(28) 대통령과 과학기술-한국역대 대통령의 과학기술 리더십-(과학사랑 2005) 
(29) 우리과학, 그 백년을 빛낸 사람들 Vol.1 여명기(과학사랑 2009)
(30) 우리과학, 그 백년을 빛낸 사람들 Vol.2 요람기(과학사랑 2009)
(31) 우리과학, 그 백년을 빛낸 사람들 Vol.3 도약기(과학사랑 2009)
(32) 일만명의 한국과학기술인명록 Vol.4 별책(과학사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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