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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부 - 故 안수한 박사 회상록

이름 |
관리자
Date |
2015-01-12
Hit |
5767
 


집필자: 명지대학교 토목환경공학과 명예교수 편종근


 


 


 


교수님의 생애


삼계(三溪) 안수한 교수님은 1925년 4월 8일(음력), 이른바 초파일에 경상남도 상북면 소석리 88번지에서 부친 안영호 선생님과 모친 이금순 여사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나셨다. 이 후 상북 보통학교를 거쳐 해방되던 해에 일본 시가현립 이마쯔 중학교를 졸업하시고 1948년에 일본 고베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곧 이어서 일본 구주대학 공학부 토목공학과를 1951년에 졸업하셨다. 역시 이어서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을 1954년 3월까지 수학하셨다. 
그 해 4월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강사로 부임하시고 6월 19일에 유영숙 여사와 결혼하셨다. 이 후 대우강사,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거쳐 1969년에 교수로 승진하신 후, 1990년 8월에 “우리나라 해안공학연구의 발자취”라는 강의를 끝으로 36년간 봉직해 오신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하셨다. 
그간 1956년 8월에서 1957년 7월까지 미국 Minnesota 대학 대학원에서 객원연구를, 1965년 1월에서 1966년 6월까지 동경대학 연구원을 역임하신 후 마침내 1966년 10월에 동경대학에서 “하천 및 해역에 있어서의 수류의 확산에 관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다. 1974년에는 동경대학에서 특별연구원으로 파랑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셨고, 1976년에서 1978년까지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부속 생산기술연구소장을 역임하셨다. 
학회 활동으로는 한국 수문학회 회장, 한국 해안.해양공학회 회장을, 국제적으로는 APD IAHR의 집행위원을, 특히 1986년에는 APD IAHR 5차 학술대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셨다.   
퇴임 후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반도 개조론을 피력하셨고 일본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일본 역사의 왜곡에 대해서도 집필을 하시는 등 의욕이 대단하셨다. 
신앙적으로는 정년을 하시던 1990년에 신반포 남서울 교회에 처음 출석하시어 2004년에 세례를 받으셨고, 잘 알고 있다시피 유영숙 여사와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다. 두 아들은 모두 안 교수님의 뒤를 이어 장남인 안경모는 한동대학교 토목공학 교수로, 차남인 안성모는 삼성건설 항만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짧은 이 세상에서 그 동안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역사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남기고 안수한 교수님은 2008년 11월 1일 오전 9시 35분에 우리들의 곁을 떠나셨다. 


 


학문적 업적


교수님은 국내외적으로 35편의 논문을 발표하셨고 32건의 연구용역을 수행하셨으며 6권의 저서와 2권의 역서를 출판하셨다. 이러한 연구 업적을 총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고, 또한 보은하는 의미에서 교수님이 정년 하시던 해인 1990년 8월말에 제자들이 정년 기념사업으로 선생님의 논문 선집을 출판하여 배포하였다. 
이 선집에 실려 있는 논문은 선생님께서 국내외에서 발표하신 논문 중에서 손수 선정하신 것으로 주로 수리학과 해안공학에 관한 논문들이다. 1954-1970년 사이에는 주로 수리학에 대하여 연구하셨고, 1970년 이후에는 해안공학 분야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1969년부터 1990년까지 7화에 걸쳐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셨고, 특별강연도 3회나 하셨다. 이 선집에는 이들 특별강연문과 함께, 국내 여러 학술지에 발표하신 수공학과 국토개조에 관한 논설문도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수리학과 해안공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생님의 업적이 담긴 이 논문 선집을 통하여 선생님의 학문이 연연히 이어갈 수 있도록 후진들이 매진하여야 할 것이다. 


선생님의 연구업적을 감히 평한다기보다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나라의 역사의 질곡과 선생님의 업적의 추이를 같이 살펴봄도 뜻있는 일일 것 같아서 그러한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겠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70년대 들어서 해안공학 분야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1976년의 조력발전의 최적화와 태풍시의 파랑추산 그리고 1977년의 묵호항의 파랑특성을 선정하셨는데 우리나라 정부의 산업화를 위한 항만개발 정책과 맞물려 있음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이어 1980년의 유공 케이슨 식 방파제에 작용하는 파력연구는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그 당시의 신기술이었고, 1983년과 1984년에 발표된 군산항의 부유사 연구는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현상에 대한 규명이었다. 하구 점성토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수많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매달리고 있는 과제중의 하나이다. 
이 이외에도 선생님의 겸손하신 마음에 희생된 빛나는 논문들이 총 35편안에 들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학교수로서의 선생님은 오랜 일본 생활로 인하여 달변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에 해안공학이란 용어를 처음 도입하셨고 또한 1970년에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에 해안공학 강좌를 처음 개설하신 것은 우리나라 해안공학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1950년에 해안공학, 이른바 Coastal Engineering이 태동했으니 늦었다면 늦었겠으나, 그 당시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250$정도임을 감안하면 선생님의 선견지명은 탁월하다 하겠다. 물론 이웃 일본의 앞선 해안공학 분야의 발전이 자극이 되었을 터이다.                   


한편 32건에 달하는 조사 개발 연구 용역을 살펴봄도 선생님의 업적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70년 전까지는 주로 댐 관련 연구였으며, 70년에 들어와서 설계파에 관한 연구가 대두되고 있다. 간혹 흥미 있는 연구로는 잠수교에 대한 것과 잠실 석촌 호수의 용수량 조사 등이 있었고, 무주 양수발전소의 수리모형실험도 있었다. 잠수교는 국가안보와 관련이 있었고, 석촌 호수는 롯데 그룹과 관련이 있었으며, 양수발전소 역시 국가 전력 수급계획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선생님의 입장으로 보아서는 전두환 정권의 한강 개발 정책에 따른 1982년에 수행한 한강 하류부의 수리 모형실험이 잊을 레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신 역점 사업이었던 것 같다. 
이후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과업들이 울진, 고리 등에 있었다. 


저서는 6권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수리학분야의 태두답게 1961년의 수리학과 1977년의 개정판이 있고, 출판사를 달리하여 1976년과 1988년에 출판하셨다. 해안, 항만분야를 배려하여 항만공학 교과서를 1983년에 공저로 출간하셨다.  서울대에서 아주 초창기인 1958년에 응용역학을 공저로 내셨는데 이를 보아도 그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역서로 1960년도 판 Binder저 Fluid Mechanics(流體力學)와 동년 Linsley, Jr.저 Hydrology for Engineers(水文學)가 있다. 수문학의 경우는 공역이었다. 아마도 이 2권의 역서는 56년에서 57년에 이르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원 객원연구 시절의 영향이라 보여 지고, 아울러 그 당시 청강하셨던 것으로 생각되는 Rouse저 Elementary Fluid Mechanics를 70년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신제 석, 박사과정이 신설되어 대학원 강의가 이루어졌을 때 대학원 유체역학 교과서로 사용하셨다. 정년 시까지 이러한 신제 박사를 10명을 지도하셨고 또한 60여명의 석사를 배출하셨다.  
저서와 역서만 보더라도 선생님은 일본식 교육과 미국식 교육을 아우르는 혜안을 갖고 계셨다. 요즘의 잣대로 보면 미흡한 면도 없지 않겠지만 학문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모든 것이 일천한 선생님의 초창기 상황을 감안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학술 활동과 사회 활동


학회 활동은 선생님 생애에서 간추려 설명한 바 있지만 크나 큰 업적은 아무래도 1972년 한국 수문학회의 창립과 1989년 한국 해안.해양공학회의 창립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몇 사람이 모여서 학회를 발기한 것이 아니라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시에서처럼 학회의 태동에 앞서 충분한 준비 기간을 두어서, 수문학회의 경우 전국을 순회하며 모였던 1964년에 시작된 수공학 세미나가 모태가 되었고, 해안.해양공학회의 경우에는 1984-1986년까지의 수리학 세미나가 전신이 되었다. 이처럼 선생님은 부족하고 미흡하다고 판단되는 분야가 있으면 과감하게 개척을 하되, 여러 사람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다음으로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1986년에 워커힐 호텔에서 열렸던 APD-IAHR 제5차 학술대회를 유치하여 조직위원장을 맡으시고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하셨던 것을 들 수 있겠다.  1988년에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 당시 우리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된 줄로 알고 있는데 통계적으로 보면 88년 당시 국민소득이 5000$에 약간 미달될 정도였으니 기지개를 킬 정도는 되나 요즘과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있는 시절이었다. 하물며 그보다도 2년 전에 6000만원이 넘게 지출된 국제대회였으니 그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겠다. 과문한 입장에서 보면 아마도 토목공학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국내에 유치한 국제 학술대회가 아니였나 사료되는 바이다. 
일찍이 국제적인 감각이 있으셔서 국제학술대회를 유치도 하셨지만, 이 역시 1969년 일본 쿄토에서 열린 제13차 IAHR에서의 논문발표를 필두로 1974년, 1982년, 1984년, 1985년의 각종 국제학회에서의 논문발표 등이 밑거름이 되었을 터이고, 이후에도 87년부터 정년하신 90년까지 매년 국제학회에서 논문 발표를 하셨다.   


서울대학교에서의 활동으로는 1976년에 맡으셨던 공과대학 부속 생산기술연구소장을 들 수 있다. 요즈음이야 각 대학교에 흔해 빠진 게 연구소이지만 76년 당시의 생산기술연구소는 그 시대 공학기술의 집적이었으니 그 의의가 대단하였다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선생님의 정부기관에 대한 자문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964년 문교부의 과학기술용어 제정위원을 시작으로 정년하실 때까지 건설부, 중앙공무원 교육원, 과기처, 총무처, 국무총리실, 해운항만청, 서울특별시, KIST, 서울 Olympic 조직위원회, 경제기획원 등 두루두루 자문을 하셨다.  


이러한 죄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업적에 대한 사회적 인정으로 국민훈장 동백장, 3.1 문화상, 송산상 등을 수상하셨다. 


 


회상록을 마무리하며


선생님의 성품을 제자 된 입장에서 왈가왈부한다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긴 하나 청렴결백한 학자로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셨고 자녀들이 기억하고 있는 평소의 가르침이 “성실하고 정직하라”였다고 한다. 
강직한 성품을 나타내는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정확한 연도는 모르겠으나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 바로 직전이었으니 1970년 쯤 되는 것 같다. 그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께서 상황 파악을 못하고 다음 대권 후보자로서 자기 PR에 열중하는 가운데 서울 공대 교수 전부와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위정자의 학교에 대한 최대의 관심사는 학생들의 정부 정책 등에 대한 항의 데모였을 테니까 자연스레 데모 방지책 내지는 예방책 쪽으로 얘기가 흘러갔던 모양이었다. 이에 선생님은 발언권을 얻어 왈 “자기 자식도 머리가 크면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남의 자식의 생각을 바꿀 수가 있겠느냐”고 그야말로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씀을 일갈하셔서 김 총리께서 놀랐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정직하라는 가르침에 첨언을 하면 집에 전화가 와서 누구를 찾을 때 전화를 받기 싫으면 보통 “없다”고 하라고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말하기 쉬운데 그랬다가는 선생님의 불호령을 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기 쉬운 말로 꼬장꼬장한 분이셨다.  
이 이외에도 사람인 이상 허물도 있으셨으나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이고, 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하셨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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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공식적인 자료의 정리 외로 선생님으로부터 신제 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들로부터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모아 보았다. 여러 사람이 다각도로 보는 선생님의 모습이 좀더 인간적이고 사실적이 아닐까 사료되는 바이다.   


 


안수한 은사님에 대한 기억 몇 가지        
이정규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설환경공학과 명예교수
오랜만에 안수한 교수님에 대해 생각나는 추억담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으니 그동안 안 교수님에게 너무 무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지면을 빌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라면서 기억나는 몇 가지를 적어본다.
하나, 60년대 후반, 대학원 재학 중에 저에게 말씀하시는 가운데 교수님은 ‘물 연구를 하여 우리나라의 하천을 지키는 것’이 운명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성함이 “守漢”이어서 이미 운명적으로 한강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사명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둘, 교수님은 6, 70년대에는 평소 ‘위하수증’과 ‘낮은 혈압’때문에 건강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 위하수에 대한 물리치료로 허리에는 항상 복대를 하고 지내셨으며, 혈압을 높이기 위하여 그 당시 즐겨마시던 홍차에 양주     (‘조니 워커’로 기억함) 한 방울을 섞어서 마시셨던 기억이 난다. 그 효과였는지  평생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셋, 사모님이 결혼에 대하여 이런 얘기를 하셨다. 결혼 전에 소위 점괘에 그 당시 바다를 건너온 신랑을 만난다고 들었는데, 50년대는 ‘6.25한국전쟁’   직후라 혹시 미국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안 교수님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현해탄을 건너오신 분이셨단다. 용한 점쟁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혹시 결례가 되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바랍니다. 


 


그리움
김경호 충북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 교수
은사 안수한 교수님이 문득 그리워진다. 
바둑을 좋아하셨고 차를 좋아 하셨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산 녹차를 즐겨하셨다.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몇 십 년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무튼 첫인상은 아버지와 같은 따뜻함과 푸근함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항상 착하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셨고, 어느 상대이든 따뜻한 마음으로 배려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항상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던 것은, 교수님의 이러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친화력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안수한 교수님에 대한 추억
김 철 호남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안수한 교수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려하니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흘러서 자세하고 많은 생각은 나지 않는다. 포괄적이며 단편적인 생각의 단상을 적어본다. 학부와 대학원에서의 강의는 내가 재학할 당시의 사회상황과도 관련된 부분이지만 거의 강의를 들은 기억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그 때 전남대학교에서 나의 전공과목에 대한 교수를 뽑는다는 공고가 나왔다. 교수님께서 본인이 직접 나를 데리고 전남대학교를 방문해주셨다. 그 때 전남대학교의 원로 교수님이시던 박병기 교수님과 수리수문학 전공이시며 안 교수님과 각별한 관계가 있으시던 이관수 교수님을 만나서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주셨다. 2년 연속해서 전남대학교에서 수리학으로 공고가 났지만 그 분야는 교수를 뽑지 않아서 나는 전남대학교와 인연을 맺을 수 없었지만 안 교수님의 제자에 대한 사랑을 아직도 마음속에 간직하며 안 교수님 비문에 있는 문구처럼 “생전에 그토록 이해하고자 애쓰셨던 강과 바다의 자연현상 원리”를 오늘도 배우고자 노력한다.


 


나의 스승 안수한 교수님 회상
김재중 동아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며칠 전 대선배님으로부터 안수한 교수님과 관련된 회상을 적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랐던 안수한 교수님의 인상은 “씩씩하고 맑았다” 이었다.  내가 학생신분을 벗어나 대학에 자리를 잡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이었다. 갑작스럽게 안수한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부산에 갈 일이 있으니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여쭸더니  해운대 해수욕장 모래유실과 관련하여 부산시청을 방문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담당 공무원에게 제시하고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미 부산시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지역에 있는 관련 전문가에게 연구용역을 발주하여 최종 결과보고서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 부산시청을 방문하신 것은 최종보고서의 내용으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도 어렵고 더욱이 경제성이 너무 없어서 부산시에서 실행하기가 불가능 할 것이니, 자신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봐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담당 공무원이 많이 당황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최종보고서 결과는 실행되지 못했으니, 교수님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이미 관련 연구용역이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부산시에 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제시하셨다. 안수한 교수님이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도 가끔씩 뵐 때마다 해운대 해수욕장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내게 물어보시곤 했었다. 정말 씩씩하신 모습이라고 생각되었고, 이러한 모습은 전문가로서의 자신감과 이런 저런 상황을 복잡하게 고려하지 않는 어린아이 같이 맑은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년퇴임 이후에도 본인이 관심 있어 하시는 주제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 결과를 저서로 편찬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씩씩하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도 안수한 교수님의 그러한 모습을 배우고 싶은데, 지금의 내 모습을 보니 전혀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스승님께 죄송스럽다.


 


안수한 교수님을 회고하며
윤종태 경성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안수한 교수님은 토목공학 수공학 분야의 태두로서 그 끼치신 업적이 지대하다. 훌륭한 저서와 탁월한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 수공학의 이론적 근간을 세우셨고, 서울대학교에 재직하시며 강의와 연구 지도를 통해 학.연.산 각 분야에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셨다. 뿐만 아니라 전후 경제입국과 국가재건을 위한 대규모 인프라 구축사업과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 자문과 정책제안을 하시며 오늘날의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수자원 관리체제가 구축되는데 큰 기여를 하셨다. 지금 수질이 개선되고 치수체계가 정비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찾고 즐기는 한강의 정비사업도 안수한 교수님의 정책제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안 교수님의 업적 중 큰 또 한 가지는 우리나라에 해안공학이란 새로운 학문을 소개하고 활성화 시킨 것이다. 안 교수님은 당시 해외에서 새로운 학문분야로 대두되기 시작한 해안공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당신 스스로 해외저널을 구입, 독학하시며 후학들에게 해안공학을 강의하고 지도하셨다. 이제 해안공학은 학문적으로 수공학의 표준 분야의 하나가 되었고 산업적으로 수많은 항만 및 해안 공간 관련 사업의 근간이 되었으며 학술적으로도 여러 학회가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안수한 교수님은 학문적 열정이 대단하여 연세가 높도록 연필과 종이를 놓으신 적이 없었다. 퇴근하실 때면 항상 책상 위엔 수많은 계산과 그림이 쌓여있었고 쓰레기통은 버린 종이로 넘쳐났다. 많은 후배교수님들이 과연 우리도 저 나이에 안 선생님처럼 열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까 하며 경외의 마음을 표시하곤 했다.
또한 안 교수님은 모형실험의 대가이셨다. 실험 중 어려움에 봉착하여 대학원생끼리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릴 때 터무니없을 만큼 명쾌하고 간결한 해법을 제시해 주시곤 해 이론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학생들을 감탄하게 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항상 제자들에게 자애하셨던 안수한 교수님을 생각하면 지금 교수님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못난 제자의 모습에 한없이 송구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교수님 묘비에 적힌 대로 이제 하늘에서 그토록 궁금해 하시던 물에 숨은 원리를 찾아내고 기뻐하고 계실 안수한 교수님의 명복을 빈다


 


풍선이야기
이상화 동아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대학 졸업 후 대학원을 진학하고자 선생님을 찾아 뵌 지가 어언 30년이 지났는데 그 때가 엊그제 같다. 서울에 올라와 긴장된 마음으로 전공을 선택하고자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맏형님처럼 대해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대학원생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유머러스한 농담도  잘하셨는데 그 중 풍선 이야기는 노총각인 나에게는 감동을 넘어서는 이야기였다. 여자는 풍선과 같아 놓아줄수록 자꾸 올라가니 결혼하면 아내(풍선)다루는 법을 들려줄 터이니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다. 결혼 전 명절 때 대학원생들과 선생님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사모님을 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풍선 이야기는 더 들을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일에 무척이나 긍정적이셨던 선생님은 가정에는 풍선에 너무 긴 줄을 달아 놓아두셨던 것이다. 정년을 앞둔 지금도 선생님의 풍선 다루는 법에 대한 강의를 마저 듣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안수한 교수님 회고
정신택 원광대학교 공과대학 토목환경공학과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종종 유인물을 나눠주셨다. 당시는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아 자필로 직접 작성하셨는데 한글을 마치 영어의 필기체 형태로 크게 쓰셔서 A4 용지 한 장이 15줄 정도면 채워졌던 것 같다.
또한 수리학 시간에 층류와 난류를 설명하시면서 담배에 불을 붙이신 후, 연소중인 담배 끝부분 연기는 층류, 상층의 연기는 난류로 설명하셔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따뜻한 마음
김인철 동서대학교 토목공학과 교수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1985년 3월, 제가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고부터였다.  그 전에는 학부시절에 수리학 교재의 저자로서만 그 학문적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첫 만남부터 상당히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근엄하고 학구적인 풍모와 달리 항상 인자하고 진솔하며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어 웃으시는 모습이 교수님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주변사람들을 권위적으로 억누르거나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 않는 소탈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사과정 입학 후 막 결혼을 하고 부산 살림집에 내려가서 신혼살림의 행복감에 젖어야 할 그 때 어리석고 늦된 제자가 추운 겨울밤에 실험실에 남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잊지 않으시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는 전화를 하셨다. 저는 그 날 교수님 댁에서 먹은 노릇노릇하게 구운 구수한 식감의 등심 스테이크와 따뜻한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꼭 만나 뵙고 그 때 정말 감사했다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지금에야 이 글로써 감사의 인사를 남긴다.  
학문적으로는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국내의 수리학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아시아 태평양 국제수리학회(IAHR)의 서울 개최 및 한국해안·해양공학회 창립 등과 같은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면서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딜 가도 교수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처신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교수남과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의 소중한 시간은 해안공학자로서 저에게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한 평생을 외길로 학문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며 후학 양성과 해안공학의 발전에 기여한 교수님의 공로와 족적은 토목공학 계는 물론이고 저희 제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고, 하늘에서 항상 지켜보고 계실 것을 믿으며 교수님의 훌륭하신 가르침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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